르세라핌의 ‘SPAGHETTI (feat. j-hope of BTS)’는 11월 8일 자 빌보드 핫 100 차트 50위로 데뷔했다. 2024년 3월 ‘EASY’ 99위, 같은 해 9월 ‘CRAZY’ 76위에 이어 르세라핌의 최고 순위다. 글로벌 200 차트에서는 6위로 첫 톱 10에 진입했다. 미국 제외 글로벌 차트는 3위로 첫 톱 5다. 올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과 블랙핑크, 방탄소년단의 활발한 솔로 활동 등으로 K-팝의 핫 100 진입이 역대 최다 수준이다. 하지만 신예 K-팝 아티스트로 범위를 좁혀보면 르세라핌의 성과는 KATSEYE, 스트레이 키즈와 함께 큰 인상을 남긴다. 특히 르세라핌이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여정이 미국 시장에서 걸그룹으로 자리 잡기 위한 일관된 접근의 결과라는 점에서, 이 다음을 계속 기대하게 된다.

르세라핌의 미국 시장 진입의 한 축은 2023년 가을 ‘Perfect Night’ 캠페인으로 시작된 문화적 프로모션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 ‘오버워치 2’와 스트리머 협업, NBA 파트너십으로 이어지는 행보는 K-팝 팬덤 외부에서 우호적이고 캐주얼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이후 2024년 2월 ‘EASY’가 빌보드 핫 100 99위로 데뷔하며, 르세라핌은 첫 차트 진입을 달성한다.
또 다른 축은 ‘CRAZY’에서 ‘SPAGHETTI (feat. j-hope of BTS)’로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특수하지만 문화적으로 중요한 커뮤니티의 존중을 얻어내는 고민이 담겨 있다. ‘CRAZY’를 보자. 이 노래의 퍼포먼스는 댄스 장르 중 하나인 보깅(voguing) 요소를 담고 있다. K-팝의 자유로운 복합적 특성을 생각하면 놀라운 선택은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CRAZY’는 보깅이 근원을 두는 볼룸(Ballroom) 씬에 대한 인식과 존중을 담을 줄 알았다.

이것은 왜 인상적인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볼룸 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볼룸 씬은 1970~80년대에 뉴욕에서 시작된 흑인, 라틴계 LGBTQ+의 언더그라운드 서브컬처다. 당시 이들이 속한 사회적 환경은 매우 가혹했다. 그들은 주류 사회로부터 동성애/트랜스젠더 혐오에 더해 인종차별이라는 겹겹이 쌓인 억압 아래 놓였다. 많은 이들은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아 살 곳을 잃었다. 이들은 선택된 가족(chosen family)으로서 ‘하우스(house)’를 조직했다. 그 보살핌을 받는 젊은 구성원들은 ‘아이(children)’라고 불리고, 하우스 이름을 자신의 성처럼 썼다. 볼(ball)은 이들의 자신의 정체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안전지대이자 파티, 퍼레이드 그리고 가족 간의 경쟁이다. 이들은 춤, 외모, 패션 등 다양한 기준을 겨루는 ‘카테고리(categories)’ 안에서 가족(하우스)을 위해 겨루었다.
보깅은 그 안에서 탄생한 신체적 표현이다.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럭셔리 패션 잡지의 화보와 포즈에서 영감을 받은 춤이다. 날카롭고 각진 몸동작, 특유의 핸드 퍼포먼스, 플로어 퍼포먼스가 특징이다. 자신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 분야에서 결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 간절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몸짓은 춤이 되었다. 많은 하우스의 이름이 패션 브랜드(또는 이 역시 하우스)의 이름을 딴 것은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보깅은 단순한 시각적 장식으로서 춤의 한 갈래가 아니다. 그것을 단지 좋아 보인다는 미적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그 의미를 박탈하고 역사를 훼손하는 일이다.
‘CRAZY’의 뮤직비디오에는 유명 하우스 중 하나인 아이코닉 하우스 오브 주시 쿠튀르(Iconic House of Juicy Couture)의 멤버들이 출연한다. 그들 모두가 댄서 또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크레딧에 수록되었다. ‘CRAZY (Vogue Remix)’는 보깅에 좀 더 적합한 버전으로 볼룸 씬의 아이콘이자 댄서, 안무가, MC인 데쉬언 웨슬리(Dashaun Wesley)’가 참여했다. 워너의 OTT 서비스인 HBO 맥스는 2020년부터 3개 시즌에 걸쳐 보깅 리얼리티 경쟁 프로그램 ‘레전더리(Legendary)’를 방영했다. 하우스 오브 주시 쿠튀르는 이 쇼의 시즌 3 우승팀이다. 데쉬언 웨슬리는 전체 시즌의 MC였다.
한국 기반의 르세라핌이 미국 대중문화의 지도 안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장르, 지역, 정체성 등을 출발점으로 삼기는 어렵다. 하지만 르세라핌은 볼룸 문화와 보깅을 단순 차용하는 대신 깊고 진정성 있는 협업을 할 수 있다. 이는 볼룸 문화의 역사적 맥락과 연결되어 ‘두려움 없는 자기 표현’이라는 보편적 가치와 그룹의 브랜드 정체성인 ‘FEARLESS’를 공유하는 충성도 높은 동맹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르세라핌이 보깅을 제대로 하는지 평가하는 수행의 측면이 아니다. 오히려 보깅을 똑같이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함량의 안무 요소로 삼으면서, 이것이 어디서 왔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는 지지와 연대로 K-팝 역사의 드문 장면을 만들었다.

이제 2024년 ‘SBS 가요대전’의 르세라핌이 ‘Category is LE SSERAFIM’이라는 공연을 올린 것에서 좀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이는 르세라핌이 기존의 분류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그룹이라는 일반적인 선언보다 더 많은 함의를 품는다. 르세라핌은 이날 ‘CRAZY’의 ‘Vogue Remix’ 버전에 맞춰 보깅 무대를 선보였다. 예컨대 K-팝 씬의 가장 큰 쇼 중 하나는 ‘볼’이 되었고, 그 카테고리 중 하나는 ‘르세라핌’이며, 그 무대에는 데쉬언 웨슬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SPAGHETTI (feat. j-hope of BTS)’는 르세라핌이 ‘CRAZY’로 구현한 가치를 얼마나 끈질기게 고민하고 그 맥락의 후속을 이어 나갈 수 있는지 증명한다. 노래는 르세라핌 자신들의 못 본 체할 수 없는 존재감을 “이빨 사이 낀 스파게티”에 비유한다.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것처럼, 이 노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상황을 “사람들이 우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우리에 대해 할 말이 많은” 현상과 연결 짓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도 르세라핌 자체의 메시지와 LGBTQ+ 커뮤니티와의 연대는 중첩된 메아리처럼 들린다. “그냥 포기해 어차피, eat it up”이라고 외칠 때, 이를 2024년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 무대 이후의 잡음을 극복하고 ‘아메리카 갓 탤런트(America's Got Talent)’ 무대와 ‘EASY CRAZY HOT’ 투어의 성공으로 상징되는 서사적 역전의 마무리로 보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럽다. 동시에 이들이 “나의 입맛대로 saucin’ / And now the world’s gone mad”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지난 수년간 한국에서조차 드랙이 대중문화의 일부가 된 것을 기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대는 은근한 메시지가 아니다. 뮤직비디오에는 유명 드랙 퀸 나나 영롱 킴, 캼, 링링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일관된 태도가 곧 진정성이고, 이는 르세라핌의 음악을 이루는 줄기 중 하나가 뿌리내린 문화적 토양에 대한 존중이다. 퀴어 요소에 대한 해외 팬들의 우호적이고 섬세한 반응은 그 존중하는 마음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어떤가? 이 곡은 안전한 팝송이 아니다. 일견 난해한 프로덕션은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가사의 주제를 그대로 소리로 구현한 것처럼 들린다. 둔중한 신시사이저와 카우벨이 돋보이는 도입부 그리고 제이홉의 공격적인 랩 피처링은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CRAZY’에서 이어지는 클럽 지향 사운드의 외형 확장으로 보인다. 올해 제이홉은 솔로 활동으로 ‘LV Bag (feat. j-hope of BTS & Pharrell Williams)’, ‘Sweet Dreams’, ‘MONA LISA’, ‘Killin’ It Girl’을 연이어 히트 곡으로 만들었다. 그의 참여는 노래와 뮤직비디오의 의도적 혼란이 예술적 선택이라는 무게를 부여한다. 존경받는 아티스트에 의한 승인의 옳은 예일 것이다.
르세라핌은 데뷔 3년, 미국 시장에서의 직접 활동으로는 2년 만에 믿을 수 있는 지지 기반을 만들었다. 게이밍, 프로스포츠, 대형 TV 쇼로 대중적 친밀도를 쌓아 올려 성공적인 투어로 이어지는 과정은 이미 더 나은 대중적 입지와 더 큰 공연이라는 긍정적 순환 구조가 눈앞에 보인다.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문화 집단과의 연대는 르세라핌의 메시지에 진정성을 부여하고, 이들을 한국 출신의 이국적 걸그룹이 아니라 미국 문화와 연결된 글로벌 팀으로 만든다. K-팝의 성공에 대해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퀄리티는 보편적’이라는 인식의 연장선에서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더 나은 언어적-문화적 소통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K-팝의 해외 진출이 한국어로 해야 진짜라는 한때의 좁은 인식은 지난 몇 년 사이 한참 발전했다. 르세라핌은 그 최전선으로 바람을 맞으며, 두려움 없이,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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