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예술 분야에서 ‘여성 ○○’라는 수식어는 불편한 뉘앙스를 남기지만, 힙합에서만큼은 다르다. ‘여성 래퍼’는 차별이 아닌,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나온 또 하나의 주체를 가리킨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존경받는 여성 래퍼들의 오랜 노력과 투쟁이 세간의 인식을 바꿨다. 그래서 여성 래퍼가 자신의 성별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서사의 범위를 확장하는 행위가 된다. 그들은 남성 래퍼가 대신 말해줄 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동안 여성 래퍼의 활약이 주춤했지만, 지금은 제2의 여성 래퍼 전성기를 맞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안에서 한 아시안 래퍼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일본 오키나와 출신의 아위치(Awich)다. 그의 존재가 일본 힙합 씬을 넘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20년부터일 것이다. 유니버설 뮤직 재팬(Universal J)과 계약하고 EP ‘Partition’을 발표한 해다. 또한 2년 뒤에는 정규 앨범 ‘Queendom’을 통해 인지도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그래서 아위치를 2020년대에 등장한 래퍼로 인식하는 이들도 많은데, 실은 데뷔 20년 차를 바라보는 베테랑이다.

그의 공식적인 출발은 2006년 EP ‘Inner Research’였다. 이듬해인 2007년에는 자체 제작한 첫 번째 정규 앨범 ‘Asian Wish Child’를 발표했다. 다만 이후의 공백기가 꽤 길었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로 이주해 음악과 거리를 둔 채 새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아위치는 미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딸을 낳았으며, 대학에서 경영 및 마케팅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하지만 비극적인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뒤,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아위치의 음악 언어가 만들어지던 시기가. 미국에서의 삶과 비극을 지나 일본에서 활동하며 주류 씬에 진입하기까지의 여정 속에는 개인적 상실과 모성, 힙합 음악에 대한 공감, 그리고 오키나와라는 지정학적·문화적 배경이 뒤섞여 있다. 아위치는 미군기지 문제를 비롯한 오키나와의 역사적 맥락을 완곡하게, 그러나 결코 희미해지지 않게 담아낸다. 또한 모성을 노래할 때 그것은 개인적 서사일 뿐만 아니라 여성 아티스트가 공적 무대에서 자신의 서사를 소유하는 방식에 관한 선언과 다름없다. 그리고 해외 아티스트와의 협업은 단지 상업적 시도를 넘어선 일종의 문화적 대화다.

새 정규 앨범 ‘Okinawan Wuman’은 이 모든 아위치의 음악적 특징과 장점이 고스란히 응축된 작품이다. 조이 배드애스(Joey Bada$$), 퍼그(aka A$AP Ferg), 루페 피아스코(Lupe Fiasco), 웨스트사이드 건(Westside Gunn) 등 미국 힙합계의 유명 인사가 대거 참여한 가운데 가장 놀라운 점은 르자(RZA)가 총괄 프로듀서로 나선 것이다. 르자가 누구인가?! 각자 독보적인 개성과 실력을 겸비한 래퍼들로 구성된 전설적인 그룹 ‘우탱 클랜(Wu-Tang Clan)’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1990년대 힙합 사운드에 혁명을 가져온 아티스트다. 특히 르자는 쿵푸, 검술, 사무라이 등 자신이 심취한 동양 문화의 요소를 끊임없이 결과물에 녹여왔다.
우탱 클랜의 음악은 뉴욕 거리의 정신과 동양 무술 및 철학을 융합한 결정체였으며, 그가 사운드트랙에 참여한 영화 ‘킬 빌(Kill Bill)’과 애니메이션 ‘아프로 사무라이(Afro Samurai)’는 일본 사무라이 액션이 중요하게 활용된 작품이었다. 그래서 아위치와 르자의 만남은 ‘사운드 전반의 철학과 분위기’를 공통 언어로 삼은 협업처럼 느껴진다. 아위치 역시 “RZA라는 스승과 함께 오키나와의 영혼과 힙합의 정신을 결합해 세계를 향한 나의 여정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을 래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앨범은 르자 특유의 극적인 샘플링, 어두우면서도 묵직한 비트, 그리고 동부 힙합 특유의 꺼끌꺼끌한 질감을 바탕으로 한다. 영화 ‘여죄수 사소리’와 ‘수라설희’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배우이자 싱어 카지 메이코의 ‘Jeans Blues’(1974)를 샘플링한 ‘Wax On Wax Off’, 둔탁한 드럼 위로 하늘거리는 샘플 멜로디가 얹힌 ‘Hold It Down’, 우탱 클랜 스타일에서 느긋한 트랩 프로덕션으로 그리고 역동적인 얼터너티브 힙합 사운드로 변주되는 ‘Noble Lies’ 등은 프로덕션적인 하이라이트다.
이렇듯 트랩 비트에 기반을 두고 드릴, 레게톤, 팝랩 등 트렌디한 프로덕션을 위주로 했던 ‘Queendom’(2022)과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보인다. 여러 프로듀서를 기용한 팀워크보다는 전담 프로듀서 한 명과의 결합을 택한 결과다. 그리고 이 같은 변화는 단순한 음악 스타일의 전환이 아니라 아위치가 자신의 서사를 제대로 쓰려는 시도로 읽힌다.

잠시 일본 힙합의 과거를 돌이켜보자. 다른 나라의 씬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 중후반까지 일본 힙합은 미국 동부 힙합 스타일의 영향 아래 있었다. 비단 사운드 측면만이 아니다. 지역성, 정치성, 문화적 뿌리를 가사에 담아내는 지점까지 비슷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남부 힙합과 팝랩 스타일이 주류를 장악하면서 일본 힙합 역시 미국 힙합과의 새로운 사운드 동기화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제와 가사의 방향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중심에서 아위치는 역사의 공간인 오키나와를 전면에 내세워 자신의 뿌리와 현재를 기록하며 일본 힙합의 좌표를 미세하게 변환시킨다. 그가 발 디디고 선 섬 오키나와는 그저 고향이 아니라 역사와 전쟁, 빼앗긴 말과 다시 되찾은 노래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기억의 장소다. 또한 일본 본토와의 거리감이 직접적으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앨범 전반의 분위기를 규정한다. 그 안에서 비롯한 개인의 경험은 집단의 역사로 확장되고, 동시에 다시 개인의 목소리로 수렴된다. 즉 오키나와는 이야기의 소재이자 시점이다. 그래서일까? ‘Okinawan Wuman’을 듣다 보면 기억의 지층을 파내려가는 굴착 작업처럼 다가온다.
아위치의 랩은 기술적으로 탄탄하지만, 이번 앨범에서는 그 기술을 과시하지 않는다. 어떤 순간엔 칼날처럼 날카롭고, 어떤 순간엔 바람처럼 부드럽다. 플로우는 마치 감정의 지형을 바꿔가는 손짓에 가깝다. 이를 통해 아위치는 개인의 고통이나 성취를 강조하기보다 자신이 어떤 조건 속에서 여기까지 왔는지를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그 어느 때보다 진술에 가까운 랩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앨범 전반에 걸쳐 유지된다.
2010년대 트랩에 심취한 또래 래퍼들과 달리, 뉴욕 붐뱁 힙합을 앞세워 등장한 조이 배드애스와 르자도 피처링한 ‘Fear Us’는 대표적이다. 세 아티스트는 각자의 경험과 시선으로 진실을 두려워하는 이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선언과도 같은 제목은 위협이 아니라 살아남아 존재한다는 사실의 증명에 가깝다. 시작을 열어젖힌 아위치의 문학적인 첫 번째 벌스를 보라. 과거 오키나와가 겪어야 했던 전쟁의 비극을 거론하며 두려움과 정체성에 대한 고찰을 탁월하게 담아냈다.

한편 앨범에서 드러나는, 아니 아위치가 보여주려 하는 여성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자의 책임감과 생존한 이의 목소리가 그것이다. 아위치는 탄생과 죽음, 상처와 치유, 붕괴와 재건,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역사 등 이 모든 것을 한 여성의 시간 안에 넣어 앨범 전체를 관통하도록 설계했다. 그렇게 아위치의 여정을 따라가다가 마지막 정규 트랙 ‘Noble Lies’에 닿는 순간, 이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요소가 ‘고귀한 거짓말’임을 알 수 있게 된다(“세상은 가장 고귀한 거짓말로 돌아가네(The world goes around on the noblest lies)”).
이번 앨범 내내 아위치가 들려준 이야기는 음악을 넘어 어떤 사람의, 어떤 땅의, 어떤 시대의 체온이었다. 더불어 오키나와에서 시작된 한 목소리가 일본을 지나 아시아 그리고 세계로 건너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그렇기에 ‘Okinawan Wuman’이 끝나는 지점은 역설적으로 아위치의 새로운 서사가 시작되는 지점처럼 느껴진다. 힙합 문화가 던져온 가장 오래된 질문 중 하나, ‘너는 누구인가?’에 대한 아위치의 대답이 이렇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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