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스스로를 끝없이 들여다보고 다시 쌓아올린 아티스트의 시간. 그리고 이제 선미는 과거의 자신을 끌어안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19년 만의 첫 정규 앨범 ‘HEART MAID’ 활동이 마무리됐는데, 감회가 남다르겠어요.
선미: 18년 동안 활동했으니까, 선미라는 사람을 개인으로서든 가수로서든 정리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나오게 된 앨범이 ‘HEART MAID’예요. 이번 활동이 끝나니까 완전히 부서진 느낌이에요.(웃음) 이 느낌이 너무 좋아요. 새로운 뭔가를 다시 할 수 있어서.

아티스트에게는 항상 정리하고 새롭게 나아가야 하는 시점이 오는 것 같아요.
선미: 한 번은 부수고 가야 하는 것 같아요. 저에게 세 번의 터닝 포인트가 있었어요. 원더걸스로 데뷔했을 때의 음악들, 솔로 아티스트이자 퍼포머 선미로서 보여드렸던 음악들, 그리고 ‘Balloon in Love’와 ‘BLUE!’처럼 앞서 보여드린 음악들과는 다르지만 제 취향을 기반으로 한 또 다른 음악들. ‘Balloon in Love’와 ‘BLUE!’를 내면서 이제야 제 그림이 완성된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세 번의 포인트를 이번 앨범에 쭈르륵 풀어냈어요. 

‘엘르 타일랜드’와의 인터뷰에서 ‘HEART MAID’에 대해 설명할 때 “20대 때의 불안한 감정을 컨트롤하는 방법들을 배우고 치유가 되었다.”고 말했어요. 그 과정이 앨범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요?
선미:  20대 초반에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를 알 수 있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 시간이 꽤 길었고, 늦은 사춘기처럼 왔고. 그건 어두운 감정들이라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 감정들을 그대로 두되 밝게 풀어보자는 생각이 20대 초반부터 있었어요. 사실 ‘HEART MAID’가 스스로 생각했을 때 좋은 밸런스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번 앨범에서는 저의 취향을 조금 더 앞에 내세우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대중성은 계속 고려할 테니까요.

그렇게 작업해보니 어떤가요?
선미: ‘Balloon in Love’와 ‘BLUE!’를 쓴 선미는 정말 해맑고 긍정적인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다시 제 20대 초중반 시절을 마주하니까 그때의 어두운 친구가 다시 올라오더라고요. 감정이입이 되어서 조금 물든 거예요, 그 어두운 물이.(웃음) 하지만 저는 그것도 너무 좋았어요. 그만큼 모든 곡을 정말 진심을 담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HEART MAID’에는 ‘마음 돌보미’로서 듣는 이들을 위로하겠다는 뜻이 있어요. 여러 감정을 정리하면서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도 볼 수 있을까요?
선미: 여유라는 표현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 어릴 때 저는 스스로를 돌봐줄 겨를이 없었어요. 일도 많았고, 어렸고. 그런데 지금은 요령들이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여유가 생겼어요. ‘이런 순간에는 이렇게 이겨내면 되겠구나.’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봐주고 싶어서 ‘HEART MAID’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작업을 하다 보니 스스로의 감정도 돌봐주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타이틀 곡 ‘CYNICAL’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해학적으로 전달해요.
선미: 사실 이번 앨범이 너무 심각하게 표현되거나 심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지났을 때 다시 보면 스스로 살짝 오그라들 것 같아서요.(웃음) 그래서 항상 저는 모든 작업물에서 해학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CYNICAL’에서 심각해지지 않으려고 생각한 장치가 처녀귀신이었어요. 처녀귀신은 무조건 한을 품고 죽잖아요. 그만큼 냉소적일 수가 없는데, 그런 처녀귀신이 “왜 이렇게 다들 냉소적이야? 이렇게 조금 웃자!”라고 하면 너무 귀여울 것 같았어요. 저는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면서도 귀엽고 웃긴 처녀귀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무서워하는 팬분들도 계셔서…(웃음)
 
사람마다 해석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웃음) 선미 씨의 음악에서는 중의적인 의미를 갖거나 다양한 시선이 교차하는 가사가 많아요. ‘미니스커트’에서도 “너무 뭐라지 마요”, “오해 오해 (no no) 해서 뭐해 / 다 사이좋게 지내 친구 사이에”라는 가사처럼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요.
선미: 미니스커트라는 소재는 여러 방향으로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전에 작업했던 ‘꼬리’도 그렇고, 유혹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들이 있잖아요. 그런 표현 중 하나가 미니스커트라고 생각했어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미니스커트를 입는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노래 가사를 보시면 사실 그냥 미니스커트를 입고 예쁘게 단장해서 친구들과 놀러간다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오해 오해 (no no) 해서 뭐해”라는 표현을 넣었어요. 

관종 경제를 다룬 ‘누아르(Noir)’나 대중 심리에 대한 ‘날라리(LALALAY)’, 그리고 심각해지지 말자는 메시지를 던지는 ‘CYNICAL’처럼 사회의 여러 단면을 포착하는 시선이 돋보여요.
선미: ‘CYNICAL’을 쓰고 나서 깨달았는데, 제 가사들이 조금씩 비뚤고 삐딱한 거예요. 저는 냉소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런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거든요. 평소에 따뜻한 성격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그것도 저의 모습이더라고요. 따뜻한 것도 저고, 차가운 것도 저예요. 그래서 지금은 ‘이런 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또 어디 있어. 다 가지고 있는 건데.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겠다.’ 이렇다는 걸 깨달았어요. 평소에 주변을 대할 때는 차가운 성격이 아니지만, 그런 점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게 저의 원동력인 것 같아요.

냉소적이라기보다 섬세해서 눈에 보이는 게 많은 게 아닐까요? ‘BLUE!’나 ‘Happy af’, ‘긴긴밤’ 같은 곡들이 다양한 결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처럼요.
선미: 제 노래들은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 저는 사랑을 남녀 간의 사랑으로 특정하지는 않아요. 연인의 사랑일 수도 있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일 수도 있고, 팬과 가수 사이의 사랑일 수도 있어요. 제가 곡을 모호하게 쓰는데, 사람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봐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나 봐요. 예를 들면 이번 앨범에 ‘Bath’라는 노래가 있는데, 가사만 보면 권태로운 관계에서 분리되고 싶은 사랑 노래 같지만 사실은 업무 시간 외에 카톡하지 말라는 이야기거든요.(웃음) 사랑을 노래할 때 관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선미 씨가 생각하는 사랑은 어떤 것인가요?
선미: 제가 생각하는 사랑은 헌신과 희생이에요. 제 방식의 사랑을 풀어낸 노래가 첫 번째 트랙인 ‘MAID’예요. 이 노래를 들으시면 ‘무슨 이야기야?’ 싶거든요. 듣는 분들이 자유롭게 해석해주시면 좋겠어서 비워놨던 이야기를 말씀드리자면, 두 인물이 있어요. 한 명은 메이드고 다른 한 명은 집주인이에요. 주인이 극악무도하고 악랄한 짓을 했는데, 메이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일을 자신이 한 것처럼 덮어준 거죠. “Just took my blade”, 주인의 칼을 그냥 숨겨줬어요. 메이드는 주인을 사랑했거든요. 그래서 떠나요. 자신이 덮어주고 숨겨주면 주인이 계속 그렇게 살 테니까. 주인이 그걸 알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집을 어질러놔요. 그렇게 어지럽혀 놓으면 항상 메이드가 정리해줬으니까. 그러다 깨닫는 거죠. 메이드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걸. 그게 너무 슬펐던 주인이 막 웃고,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소리치다가 “Now let me be your maid(이제는 내가 너의 메이드가 될게)”라고 하면서 메이드를 따라가는 내용이에요.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아요. 너무 재밌어요.
선미: 정말요?(웃음) 사실 이건 저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불안하고 자기 멋대로인 20대 초반의 제 모습과, 온화하고 평안하고 묵묵한 지금의 저. 20대 초반의 제가 지금의 저를 가끔씩 따라오면 받아주고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아껴줘야죠. 그것 또한 저니까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사랑이에요. 

그 말씀을 들으니 ‘BLUE!’가 생각났어요.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지나간 청춘을 끌어안아주는 노래라고 해석했거든요.
선미: ‘BLUE!’는 사실 팬들과 저의 사랑에 대해서 쓴 노래예요. 제 청춘을 돌이켜보면 화려하고 너무 예뻤지만, 또 불안하고 걱정도 많아서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쳤던 기억이 커요. 그래서 제 청춘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을 때 떠오르는 답은 하나였거든요. 팬분들. 제 팬분들이 저를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쭉 봐오셨어요. 제가 자라는 과정을 보면서 팬분들도 같이 자랐고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아닌 거잖아요. ‘우리 애가 이렇게 또 잘했네. 아이고, 기특해라.’ 이러면서 저의 모든 순간을 목도해준 건 팬분들이에요.

그 모든 순간을 거쳐온 지금은 어떤가요?
선미: 너무 좋아요. 20대 때는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스스로를 다뤄야 하는지 조금 깨우친 것 같아요. 아직도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많이 흔들리지 않고 동요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긴 게 30대의 가장 큰 수확이에요. 뿌리가 깊고 단단해진 느낌. 배도 닻을 내리면 파도가 몰아치고 바람이 불어도 멀리까지 떠내려가진 않잖아요. 30대의 저는 닻을 견고하게 내린 느낌이에요.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계신 듯해요.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비결이 있을까요?
선미: 저는 사실 취미가 없어요. 그리고 ‘집순이’라 일할 때를 제외하면 집 밖으로 잘 안 나가요.(웃음) 대신 혼자 상상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는 걸 정말 좋아해요. 제가 어떤 순간에 왜 이런 감정을 느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그 이유들을 되짚어봐요. 그러고 나면 다음 날을, 또 다다음 날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그걸 정리해야 하는 타이밍이 온다고 생각하거든요. 꽤 많은 아이돌분들이 어떻게 매번 새로운 것을 떠올릴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하는데, 정말 찰나의 시간이라도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나중에 풀어야 할 것들이 줄어든다고 생각해요.

항상 ‘자신에 대한 덕질’을 강조해왔고, 노력만으로 지금의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선미: 지금 돌이켜보면 제 장점 중 하나는 관찰력이에요. 원더걸스로 데뷔했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잘하는 게 뭘까?’ 스스로 노래도, 춤도, 외모도, 끼도 부족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하얀 도화지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것들을 계속 관찰하고 많이 파고들었고, 그런 것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됐어요.

선미 씨에게 다른 재능도 많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노력도 재능이다.”라는 말을 정말 좋아해요. 
선미: 맞아요!(웃음) 그걸 박진영 PD님이 봐주셨나 봐요. 원더걸스 연습생 때 매일 PD님한테 혼나니까 항상 연습실에 불 끄고 들어가고, 마지막까지 남아 아득바득 계속 연습하고 그랬어요. 저는 PD님이 그걸 모르시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계셔서 너무 신기했어요. 후천적인 노력으로 지금의 선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치열하게 스스로를 만들어온 시간을 ‘HEART MAID’로 한번 정리한 만큼, 앞으로는 어떤 음악을 하고 싶으신가요?
선미: ‘HEART MAID’를 만들면서 저를 한번 부쉈잖아요. 이제 이걸 조물딱 조물딱 뭉쳐서 다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는데, 부서진 상태로 조금만 더 있고 싶어요. 하고 싶은 걸 다 해서 아직은 하고 싶은 게 없거든요. 다만 지금 드는 생각은, 다음에는 밝은 음악을 한번 하고 싶어요. 온화하고 상냥한 선미를 온전하게 보여드린 적은 없었던 것 같아서, 그런 모습을 음악에 담고 싶어요.

Credit
김리은
인터뷰김리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서하나 (@haanasah)
비주얼 프로젝트 매니지먼트김민경, 안재민
현장 운영 총괄윤해인
사진최나랑
영상김영대, 김현호, 하예지 (LoCITY)
촬영 지원조윤미
헤어정다빈
메이크업손채원
스타일리스트이지은
세트 디자인02무라노
아티스트 마케팅실장은혜, 이주희, 이주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실신일섭, 손지호, 박도림, 강정우, 전용현, 김용균, 박재현, 한성민, 곽태웅,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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