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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영화 칼럼니스트)
사진 출처ABC

3월 15일에 열리는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작이 공개됐다. 주요 부문 후보작 대부분이 한국에서 개봉했거나 개봉 예정인 작품이 많다. 올해 주요 후보작들이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경향은 어느 때보다도 극장 관람을 강조하는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는 후보작들이 블록버스터 위주로 선정됐다는 말이 아니다. 거대 자본이 투입된 스튜디오 제작 영화부터 연출자의 작가 세계가 강하게 투영된 소규모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경험과 감동을 공유하며 즐기는 예술 매체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부터 소개할 6편의 주요 후보작은 OTT와 AI 시대를 맞이한 할리우드가 내세우는 현존 최고의 영화라 할 수 있다.

‘씨너스: 죄인들’ : 작품상, 감독상 등 역대 최다 16개 부문 후보
올해 시상식 최고의 화제작이다.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많은 1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경찰의 과실로 세상을 떠난 흑인 청년의 하루를 다룬 저예산 영화 ‘오스카 그랜트의 하루’로 데뷔해 ‘로키’ 시리즈의 스핀오프 ‘크리드’와 MCU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블랙 팬서’를 연이어 성공시키며 탄탄한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신작 ‘씨너스: 죄인들’은 1930년대 미국 미시시피주를 배경으로 당시에 억압받으며 살아야 했던 흑인 노동자들의 삶과 뱀파이어 소재의 호러 영화 문법을 접목시킨 영화다. 시카고 갱단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쌍둥이 형제 스모크와 스택이 술집 ‘주크 조인트’를 오픈하자, 이상한 손님들이 찾아오면서 잔혹한 사건이 벌어진다.

‘씨너스: 죄인들’은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고딕 호러의 장르 문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한편, 현대 팝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블루스와 재즈의 역사에 헌사를 바치는 뮤지컬 영화로서의 특징도 지녔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초현실적인 파티 장면에서는 블루스와 재즈, 로큰롤과 힙합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대의 음악이 한데 어우러진다. 이들에게는 흑인 음악이 종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것이 곧 이민자들의 삶 자체임을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영화 말미에는 살아 있는 블루스의 전설 ‘버디 가이’가 카메오로 출연한다. 

만약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한다면, 흑인 감독으로서는 최초 수상자가 된다. 촬영을 맡은 오텀 듀럴드 아르카파우 촬영감독 역시 아카데미 촬영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유색인 여성으로, 현재 유력한 수상 후보다. 

‘기차의 꿈’ : 작품상, 각색상, 촬영상, 주제가상 후보
퓰리처상 후보에 두 번이나 오른 데니스 존슨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영화 ‘기차의 꿈’은 20세기 초, 미국 철도 건설 현장 노동자였던 로버트 그레이니어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다. 아직 미국 전역에 철도가 놓이지 않은 시대에 벌목꾼으로 살아가던 로버트는 돈 벌 수 있는 현장을 찾아서 뜨내기 생활을 한다. 경력이 오래된 벌목꾼들은 점점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유한함을 한탄하고, 오랜 세월 숲을 이루고 있던 나무들 역시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점점 황폐해져 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가족은 영원할 수 없으며, 상실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로버트는 마치 끝나지 않는 형벌처럼 생이 다할 때까지 일을 계속 해야만 한다.

SNS에서 주로 소비되는 짧고 빠르고 자극적인 호흡의 영상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 굉장한 울림을 주는 리듬과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다. 영화의 독특한 화면 비율이 특징인데, 일반적인 와이드스크린 비율이 아니라 정사각형에 가까운 3:2 사이즈의 화면이다. 마치 오래된 고전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좌우 시야각이 좁은 화면 속에 담긴 아이다호의 자연 풍경, 특히 울창한 숲 사이로 내비치는 따사로운 빛의 질감 표현이 인상적이다. 무엇이든 시시각각 빠르게 변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묵묵하게 버티던 나무들이 문명의 발전을 핑계로 베어지는 모습은 주인공 로버트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 같다. 호주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의 리더인 닉 케이브가 주제곡 ‘Train Dreams’를 불렀는데, 그는 감독의 부탁을 받고 영화를 본 뒤 하루 만에 영화의 엔딩 곡에 가사를 붙여 노래로 만들었다. 닉 케이브는 이 영화를 두고 “비극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이야기”이자, “슬픔의 아름다운 역설(“There’s something life-affirming about this devastating story. And that’s the beautiful paradox of grief.”)”이 담긴 영화라고 말했다.

‘센티멘탈 밸류’ : 작품상, 감독상, 남녀 주조연상 등 9개 부문 후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영어권 영화가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경우는 98년 역사를 통틀어 20여 편에 불과할 정도로 사례가 적다. 그런데 ‘기생충’의 수상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칸이나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들이 아카데미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올해 9개 부문 후보에 오른 노르웨이 감독 요아킴 트리에의 ‘센티멘탈 밸류’ 역시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그랑프리)을 수상한 후에 아카데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출연 배우 4명이 모두 남녀 주조연 부문 후보에 오른 것도 이례적이다. 그만큼 영화 안에서 배우들의 앙상블이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웨덴의 명배우 스텔란 스카스가드는 이 영화로 첫 아카데미 후보 지명을 받았다. 조연 부문에 올랐지만 활약은 사실상 주연에 가깝다.

‘센티멘탈 밸류’라는 제목은 한 가족의 역사 안에서 대물림되거나 혹은 애써 버리지 못해 힘들어하는 가족 간의 트라우마나 감정의 무게를 뜻한다. 오랫동안 신작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중년의 영화감독 구스타프는 젊은 시절에 아내와 두 딸을 버려두고 작품 활동에만 매진했다. 아내가 죽은 이후 두 딸은 장성하여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데 이들 곁에 오랜만에 아버지가 찾아와서는, 가족의 비극적인 사연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심지어 가족이 살던 그 집에서 촬영을 할 것이며 손자를 영화에 출연시키겠다고 말한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깊숙하게 상처를 낼 수 있는 가족의 문제를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내 기어이 마주하게 만드는 결말이 인상적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이 서로 다른 각자의 사연을 투영시켜 공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햄넷’ :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포함 8개 부문 후보
클로이 자오 감독의 ‘햄넷’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걸작 ‘햄릿’을 완성하게 되었는지, 그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건의 내막을 상상하여 쓴 매기 오패럴 작가의 동명 소설(국내 출간명은 ‘햄닛’)을 영화화했다. 역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셰익스피어는 극작가로 한창 이름을 알리던 시기에 고향에 두고 온 아들 ‘햄넷’이 흑사병으로 사망하는 끔찍한 사고를 겪고 비탄에 빠진다. 햄넷과 햄릿이 어쩌면 밀접한 연관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그 상상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예술 작품이 지닌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관객이나 독자가 상상 속 이야기에 빠져들어 주인공의 삶이 마치 본인의 이야기인 것처럼 동일시하며 감동이나 해소, 즉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햄넷’은 바로 예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한 영화다.

셰익스피어와 그의 창작혼을 가장 잘 이해하는 아내 아녜스는 자녀들에게 자연을 사랑하고 삶의 고통을 이겨내는 법을 가르친다. 그 과정이 아름다운 미술과 음악과 촬영을 통해 훌륭하게 표현된다. 지금껏 셰익스피어와 관련된 소재를 다룬 모든 영화를 통틀어 이만큼 압도적인 연출력을 보여준 영화도 드물다. 아녜스를 연기한 배우 제시 버클리의 연기가 너무 뛰어나 여우주연상 부문은 확실시되는 분위기다. 영국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막스 리히터가 영화음악을 맡아 작곡도 하고 본인의 기존 곡을 삽입하기도 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항의, 자신의 유년 시절 고통을 성찰하는 앨범 ‘The Blue Notebooks’의 수록 곡인 ‘On the Nature of Daylight’가 쓰인 장면은 올해 가장 주목할 명장면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작품상, 감독상 등 13개 부문 후보
현재 활동 중인 미국 영화감독 중에서 작가주의 감독으로 분류되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유독 아카데미와 인연이 없었다. 칸, 베를린,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모두 감독상에 해당하는 상을 수상했음에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한 번도 그가 직접 수상한 적이 없다. 올해 주목하는 시상식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바로 그의 이름이 후보에 오른 각색상, 감독상, 작품상 중 몇 개의 트로피를 가져갈지의 여부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가 하나 이상의 트로피는 반드시 받을 것으로 예상할 수밖에 없는, 놀랍도록 뛰어나고 재미있는 영화다.

또한 이번 영화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 이제껏 만들어온 영화들과 결이 다르다. 1억 달러 이상의 대형 스튜디오 예산이 투입되었고, 아이맥스(IMAX)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숀펜, 베네치오 델 토로 등의 스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실패한 혁명가들이 공권력에 의해 오랜 기간 추격당하는 가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현재 미국이 처한 여러 사회적 위기를 그대로 재현한 것처럼 사실적이라서 주목받고 있다. 남자주연상 부문에는 밥 퍼거슨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조연상 부문에는 록조 대령 역의 숀 펜, 카를로스 역의 베네치오 델 토로, 퍼피디아 역의 테야나 테일러가 모두 후보에 올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올해는 특이하게 캐스팅 부문이 신설됐는데 이 부문에서도 유력한 수상 후보다.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 조합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퍼거슨의 딸 윌라 역의 체이스 인피니티의 연기도 뛰어나지만 아쉽게 후보 지명되지 못해 올해 아카데미의 이변으로 기록됐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 장편 애니메이션상, 주제가상 후보
3억 뷰 이상 조회 수를 달성해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많이 시청한 영화 1위에 오른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주제가상(‘Golden’) 2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아카데미의 전초전인 제83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이미 주제가상을 받았다. 최근 국제애니메이션협회 LA지부가 주관한 ‘애니 어워즈’에서는 장편 최우수상을 포함해 무려 10개 부문을 휩쓸었다. 그 외 전 세계 각종 시상식에서 100여 개 넘는 상을 수상할 정도로 신드롬의 주인공이다. 물론 올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에 오른 다른 후보작 역시 뛰어난 완성도를 선보였지만, OTT와 극장의 경계를 허물면서 일궈낸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과는 실로 대단했다.

비록 영화 속 가상의 그룹이지만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스는 실제 K-팝 아이돌의 명성을 뛰어넘는 인기를 음악계에서 누리는 중이다.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사운드트랙 수록 곡 4곡이 톱 10에 진입한 최초의 영화 사운드트랙으로 기록됐고, 제68회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Golden’이 최우수 주제가상에 해당하는 ‘베스트 송 리튼 포 비주얼 미디어’ 상을 받았다. K-팝 작곡가와 프로듀서가 그래미 어워드 트로피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거에 그래미 어워드를 수상한 애니메이션이 아카데미도 수상한 사례가 있어 이 영화의 주제가상 수상 가능성이 높다. 앞서 소개한 ‘씨너스: 죄인들’과 ‘기차의 꿈’이 주제가상 부문 경쟁작이지만, 만약 이 영화가 주제가상을 받게 된다면 역대 아카데미 트로피를 쥔 12번째 애니메이션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연출을 맡은 매기 강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K-팝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갖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러브레터”라고 표현한 바 있다. 감독이 담고자 했던 메시지가 전 세계 관객에게 음악과 더불어 전달될 수 있었던 좋은 애니메이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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