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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후, 악마는 어떻게 프라다를 입을까
이 주의 영화와 음악
Credit
남선우(‘씨네21’ 기자), 나원영(대중음악 비평가)
배급사20세기 스튜디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남선우(‘씨네21’ 기자): 다시는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보지 못할 영화 목록이 날로 길어진다. 감독이나 배우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서, 혹은 나라는 인간이 대양을 횡단해 버려서. 2006년 작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후자에 해당한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완고한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가 원망스러웠지만, 동시에 그가 휘두르는 채찍에 맞아보고도 싶었다. 앤디(앤 해서웨이)처럼 굳세게 버텨서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뉴욕의 패션 잡지사라는 배경에 시선을 빼앗긴 탓도 있지만, 서로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어른 여자들의 투숏에 심장이 요동쳤다. (예비) 커리어우먼을 위한 누아르이자 판타지로서 이 작품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이 겪는 가정불화까지 재현한다는 점에서 제법 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시간이 흘러 앤디의 나이가 되고,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윗사람을 거치고서야 깨달았다. 누군가 채찍을 휘두르면 피해야 한다.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증명해야 할 가치는 없다. 제아무리 대단한 위인을 모신 대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미란다 같은 상사 아래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간혹 생존하려면 미란다처럼 모질어져야 하는 건지 헷갈리기는 하지만, 그럴 때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오타니처럼 되뇌려고 한다. ‘동경하지 맙시다… 동경하지 맙시다…’

이런 식으로 각성한 관객이 나뿐만은 아닐 텐데 20년 만에 속편이 나온다. 정식 시사회에 앞서 열린 20분짜리 푸티지 상영회에 다녀왔다. 확인하고 싶었다. 지면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고,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인식도 생겨난 지금, 리더로서의 미란다는 어떻게 그려질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는 세상의 변화를 의식한 듯한 각본으로 시작한다. 위태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기자로 일하던 앤디는 갑작스레 해고되고, 편집장직을 유지하던 미란다는 오보 사건이 바이럴되면서 주춤한다. 실력 있는 저널리스트를 고용해 잡지의 위상을 회복하려는 발행인이 앤디를 미란다 밑으로 불러들이면서 재회가 이뤄진다. 미란다는 여전히 앤디를 무시하고, 앤디는 미란다 앞에서 작아진다. 그러나 전편의 동료 에밀리(에밀리 블런트)가 럭셔리 브랜드 광고주로 등장해 미란다를 쩔쩔매게 한다.

이렇게 관계가 역전되는 순간은 미란다와 앤디 사이에도 찾아올 테다. 미란다는 앤디를 인정하고, 앤디는 미란다는 이해하겠지. 그런 두 여자의 초상에 자신의 욕망을 겹쳐보는 게 우리 몫이 아닐까. 4월 29일 개봉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가 2006년의 쾌감을 반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2026년의 관객까지 끄덕일 만한 환상을 제공해주길 바란다. 우리는 아직도 일터에서 울고 웃는 자매들의 이야기에 목마르니까.

‘크고 거슬리는’ - 해파
나원영(대중음악 비평가): 싱어송라이터 해파는 두 번째 정규 음반 ‘건강한 사회의 일원’을 “슬픔을 아는 사람들을 위한 스탠드업 코미디”라고 소개한다. 첫 곡에서 입을 모아 “목표는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당신을 기능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마치 ‘어허야 둥기둥기’나 ‘손 모아 마음 모아’ 같은 한국의 제5공화국 시절 건전 가요처럼, 당신도 모범 시민이 되라며 해맑게 몰아붙인다. 스스로를 곡에서 묘사하는 ‘아주 즐거운 나의 집’의 일원이기보다 차라리 악당이라고 ‘자백’하는 화자는 그런 세상에 대한 비린 농담을 던진다. 그러나 건강하고 모범적인 세상을 비웃으면서도 자꾸 눈치가 보이는 마음은 왜인지 씁쓸해져만 가고, 효과음처럼 등장해 초반에 유머를 보탰던 금관악기마저 잦아든다. ‘코미디 탐험대’의 눈먼 웃음기가 점차 사라지면서, 잦아들면서, 이젠 도리어 코미디가 슬픔을 만들어낸다.

음반의 흐름을 사실상 종결하는 곡인 ‘크고 거슬리는’은 바로 이때 등장한다. 지난 음반인 ‘죽은 척하기’에서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역할을 맡았던 ‘I’m Finally a Ghost’가 음반 내내 잔향이 부유했던 전기기타 음색을 선명하게 조정하면서 기꺼이 유령이 될 힘을 표현했다면, ‘크고 거슬리는’은 곡이 진행되는 동안 갑갑한 세상에서 냅다 “소리를 지르는 방법”을 익혀 나간다. ‘당신의 사랑을 빌미로’에서 협업했던 조월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만큼, 삑삑거리는 키보드 연주 뒤편에서 들려오는 드럼과 베이스는 그의 탁월한 설계에 따라 저음질로 분방하게 달그락거리며, 짐짓 거슬릴 만한 흔적을 잔뜩 남긴다. 상대적으로 분명한 전경을 서서히 갉아먹는 이런 잡음에 힘입어, 해파도 그사이에서 소리를 한마디씩 질러본다. 이렇게 또 이렇게.

거슬리는 소리가 음향에 간섭하고 더 나아가 그 전반을 장악하는 전개는 ‘건강한 사회의 일원’이 들려주는 여러 면모에 빗댈 수가 있겠다. 모범에서 이탈한 이들의 거슬리는 아우성인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거슬리는 이탈자의 심정, 후련하게 소리 지르고 싶어도 이 답답함이 “어떤 마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불안감. 이처럼 ‘크고 거슬리는’은 그런 소리를 마음껏 내고 또 그 방법을 상상하고 배울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둔 연습실이 되어주며, 청자를 자연스레 이 연습 과정에 동참시킨다. 마지막 30초 남짓에는 코러스를 비롯해 더욱 많은 잡음이 합세하고, 시끌벅적해지는 혼란의 끝자락에서 선명해지는 건 다름 아니라 힘 있게 고함치는 해파의 목소리다. 잔기침을 남기더라도 크고 거슬리며 아주 모범적으로,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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