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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에서 시작해 삶으로 깊어지는 ‘적수다’
이 주의 유튜브, 영화,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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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후령, 백설희(작가, 칼럼니스트), 김복숭(작가)
디자인MHTL
사진 출처사피엔스 스튜디오

‘적수다’
송후령: 하나의 단어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일은 싱어송라이터 이적의 오랜 습관이다. 그는 수년 전 자신의 SNS에 특정 단어를 소재로 한 단상을 이따금 연재하고, 2023년에는 이 글들을 엮어 산문집 ‘이적의 단어들’을 펴냈다. ‘인문학 수다 팟캐스트’를 표방하는 프로그램 ‘적수다’는 그 사유의 방식을 대화로 옮긴다. 이적과 게스트들은 매회 한 단어를 붙들고 대화를 나눈다. ‘적수다’에서는 게스트를 ‘호적수’라 부르는데, 그들의 대화는 단어 하나를 물꼬 삼아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깊어진다. 

출판사 편집자 박혜진, 유튜버 강민지, 만화가 이종범이 호적수로 출연한 17화 ‘타이밍’ 편의 수다는 저마다 다른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빛바랜 단어에 새로운 의미와 맥락을 덧입히는 과정처럼 보인다. 제철 음식, 말하는 타이밍과 듣는 타이밍, 팬심을 고백할 적절한 순간, 시절 인연. 이 모든 이야기는 ‘타이밍’이라는 일상적인 단어에서 뻗어나온 삶의 조각들이다. 그리고 80분을 훌쩍 넘기는 수다 한 판이 끝자락에 다다를 무렵, 강민지는 연애, 결혼, 임신순으로 이어지는 사회가 요구하는 인생의 사이클을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사람”이라 자칭하며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자 이종범은 ‘적령기’라는 사회적 통념의 무의미함을 지적하고, 박혜진은 타이밍에 구애받지 않고 저울질 없이 밀어붙이는 의지의 힘을 강조하며 대화의 결을 확장한다. 그 과정에서 이적과 호적수들은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고루한 시선을 뒤집으며 단어 이면에 담긴 삶의 본질을 길어올린다. 바로 이것이 우리네 삶에도 대화의 호적수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퍼펙트 블루’
*해당 작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백설희(작가, 칼럼니스트): “당신은… 누구죠?” 1997년에 공개되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애니메이션 ‘퍼펙트 블루’가 지난 6월 16일 한국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 ‘천년여우’, ‘파프리카’ 등 걸출한 작품을 제작한 곤 사토시 작품의 극장 애니메이션 감독 데뷔작이다. 곤 사토시는 2010년 46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나, 그의 작품은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레퀴엠’, ‘블랙 스완’이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 등에서 오마주되며 지금까지도 여러 콘텐츠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B급 아이돌 그룹 ‘CHAM’의 멤버였던 키리고에 미마는 기획사 사장인 타도코로의 압력으로 인해 아이돌을 은퇴하고 배우로 전향하게 된다. 하지만 원치 않던 은퇴와 그 과정에서 당시 갓 발달했던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스토킹, 지나친 노출 강요 등 힘겨운 사건들이 이어지고, 미마는 점차 현실(배우)의 자신과 아이돌로서의 자신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한다. 

이처럼 ‘퍼펙트 블루’의 스토리라인은 분열된 자아를 주제로 삼아 내달린다. 그에 따라 현실과 공상이 주인공 미마의 인격처럼 섞이기 시작하고, 거기에 미마가 연기하는 작중 드라마 장면까지 더해지면서 보는 관객들 또한 어느 부분이 현실이고, 어느 부분이 공상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분열된 자아를 품에 안고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미마가 거듭 읊조리는 “당신은 누구야?”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 상태로 살아갈 순 없다. 매일매일 분열된 자아를 중재하고 통합하고 다시 또 분열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성장해 나아간다. 엔딩 장면에서 자신을 해치려고 했던 ‘루미’를 구하고, 또 그런 루미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인정하면서 운전대를 잡고 차를 몰기 시작하는 미마처럼.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백미러를 응시하는 미마는 화면 밖 우리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나는 진짜야.(내가 진짜 미마야.)”라고. 분열된 자아의 통폐합을 거쳐 한층 성장한 이야말로 ‘진짜’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퍼펙트 블루’는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회자되는 작품이 되었다. 주인공 미마는 작중 내내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며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 속을 헤매지만, 그럼에도 진짜 자신을 찾아내 ‘진짜’로서 살아가며 희망적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냉소적인 시선 때문에 오해받기 쉬우나 사실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들은 언제나 그랬다. ‘퍼펙트 블루’가 그랬듯이 ‘파프리카’도 그랬고 ‘천년여우’가 그랬다. 내년이면 ‘퍼펙트 블루’는 개봉 3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곤 사토시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30년 이후인 내년에도, 그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쉴 것이다. 이런 부분을 보더라도, 2026년 지금 ‘퍼펙트 블루’를 볼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세라 핀스커 - ‘로스트 플레이스’
김복숭(작가): 이번에 소개하는 세라 핀스커의 단편집 ‘로스트 플레이스’는 단 하나의 장르로 정의하기 어렵다. 열 편이 조금 넘는 이야기들이 묶인 가운데, 몇몇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처럼 읽히는 반면, 어떤 작품은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볼 법한 고전적인 공포담의 형식을 취하고, 또 다른 이야기들은 무성영화 시대나 뉴욕의 예술 신(Scene)을 SF적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책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기발한 장치들과 극적인 전개, 그리고 진정한 공포라고 할 만한 요소들도 물론 대단하지만, 그 무엇보다 우리가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마주하게 되는 건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있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평행 세계의 단면들이다.

이야기들의 형식 또한 각양각색으로 변화한다. 전통적인 소설 구조뿐 아니라 온라인 콘텐츠, 다수의 화자가 동시에 등장하는 구성, 학문적 연구 보고서를 연상시키는 서술까지, 흡입력 있는 다양한 모양새의 글이 담겨 있다. ‘로스트 플레이스’는 마치 드라마 시리즈 ‘블랙 미러’처럼, 불편한 진실을 부러 마주하고 싶을 때마다 꺼내 읽을 수 있는 책 버전에 가깝다. 읽다 보면 기억과 창조성, 변화, 그리고 권력에 대해 지금까지 알고 있다고 믿어온 것들을 한 번 더 의심하게 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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