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의 지난 6년을 돌아본다면 그 궤적은 2024년에 거대한 변곡점을 그릴 것이다. 2023년까지의 에스파는 서로 다른 야심을 동시에 좇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광야’라는 전례 없는 메타버스 세계관을 납득시키고, 하이퍼팝과 SMP가 결합된 난해한 사운드를 관철하는 동시에 아이돌로서 대중적 인기를 쟁취해야 했다. 이 시기를 흥미롭게 기억하는 이유는 서로 다른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는 야심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음악 자체의 구조적 쾌감과 세계관의 복잡한 텍스트가 전달되는 속도와 방법은 다를 것이다. K-팝의 매력적인 이미지에 먼저 이끌린 어떤 이에게 프로덕션의 디테일은 낯설 수도 있다.
2024년, ‘Supernova’와 ‘Armageddon’을 거쳐 ‘Whiplash’로 이어진 흐름에서 앞서 설명한 충돌은 서로 다른 수요를 충족하는 구획 정리로 발전했다. 이 시기의 에스파는 세계관은 그대로 발전시켜 핵심 팬층에 공급하지만, 음악을 대중에게 전달할 때는 이를 세계관과 굳이 연결하지 않았다. 음악은 더 과감하고 비주얼도 공격적이지만,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운 스타일은 ‘쇠맛’이라는 직관적이고 공감각적인 키워드로 정리했다. 대중은 더 이상 ‘블랙 맘바’나 ‘싱크’를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스피커를 찢고 나오는 금속성의 베이스라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쇠맛’은 농도 짙은 장르성과 사운드의 질감을 묘사하는 동시에, 그것이 좋은 이유를 분석하지 않고도 공유할 수 있는 키워드로 합의되었다. 에스파는 2024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반 후보이자 최우수 케이팝 음반, 올해의 노래이자 최우수 케이팝 노래로 3관왕에 올랐다.
그리고 2번째 정규 앨범 ‘LEMONADE’가 도착했다. 이 작품은 2024년의 방법론을 재해석한다. 음악이 댄스를 중심으로 장르적으로 선명해질 것은 이미 짐작되는 바다. 레몬을 형상화한 앨범 커버는 ‘Armageddon’ 앨범 커버의 미스터리 서클과 호응한다. 외계에서 온 ‘쇠맛’에 새로운 감각, 이른바 ‘신맛’이 더해졌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래서 이 앨범을 들여다보는 일은 ‘신맛’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묻는 것과 같다.

‘LEMONADE’를 관통하는 성취는 팀의 활동에 세계관을 다시 불러들이면서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세계관은 은밀한 암호나 독특한 음악을 정당화하는 배경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의 일부가 되었다. 광야의 역사는 ‘나영석의 와글와글’ 같은 대형 유튜브 콘텐츠의 일부가 되고, ‘집대성’ 채널에서는 아예 멤버가 설명회 형식으로 직접 해설에 나선다. 세계관은 여전히 거기 있다. ‘LEMONADE’ 뮤직비디오는 ‘레몬 버그’를 비롯한 새로운 개념을 다룬다. 하지만 에스파는 세계관을 ‘거기 두고’, 고유의 음악과 패션으로 브랜드와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한다.
‘WDA (Whole Different Animal) (Feat. G-DRAGON)’와 ‘LEMONADE’라는 큰 축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면 ‘LEMONADE’ 앨범의 사운드는 다양하다. ‘WDA’의 힙합 기반 그루브, ‘LEMONADE’의 EDM, ‘Can’t Help Myself’의 왜곡된 기타 록, ‘Camouflage’의 드림 팝, ‘My Plan’의 미디엄 템포 R&B, ‘Switchblade (Feat. Ty Dolla $ign)’의 일렉트로닉에 이른다. 이러한 다양성이 산만함으로 흩어지지 않는 이유는 앨범 전체가 묵직한 신스 베이스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멜로디와 장르는 곡마다 갈아입되 저음의 골격은 일관되게 유지한다.

하지만 ‘LEMONADE’를 ‘신맛’으로 이끄는 것은 사운드가 아니라 그 위에 얹힌 목소리다. 달리 말하면 이 앨범의 ‘신맛’은 음악적 색채의 전환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신맛’이란 결국 인간적인 면모의 다른 이름이며, 그것이 이제와 가능해진 이유는 대중이 이 팀을 6년간 지켜본 시간이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데뷔 초 에스파에게 세계관은 음악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 보였다. 아바타(æ), 싱크 같은 두꺼운 설정이 그룹을 감싸고, 차갑고 기계적인 보컬 톤은 음악적으로 표현된 장막이 되었다. 각 멤버는 거대한 세계관을 성립시키는 캐릭터처럼 보였다. 많은 이들이 멤버 개인의 표정보다 그들이 구현하는 콘셉트를 먼저 읽었고, 목소리의 떨림보다 사운드의 위압감을 먼저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쇠맛’이라고 불렀을까?
6년이라는 시간은 이 구도를 천천히 허물었다. 그사이 대중은 무대 밖의 멤버를 충분히 지켜봐 왔다. 무대와 예능, 인터뷰로 드러나는 고유한 매력이 이들을 직접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부여한다. 더 이상 광야의 설정을 경유하지 않고도, 우리는 이들이 누구인지 안다고 느낀다. 그리고 정확히 그 여유가 무르익은 시점에, 에스파 본인들 또한 자신들을 ‘신맛 버전’으로 풀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우연한 동시성이 아니다. 대중이 인간적으로 바라볼 준비가 되었을 때, 인간적으로 내보일 수 있게 된다.
패션은 이 전환을 시각의 언어로 번역한다. 데뷔 이래 지속된 미래 지향적 이미지는 ‘LEMONADE’ 뮤직비디오에서 세기말의 클럽 룩과 1960년대 비비드한 미니 드레스로 대체되었다. 레트로는 곧 시간을 통과한 존재의 표식이다. 다만 에스파의 레트로는 끝내 친절하지만은 않다. 레트로 스타일의 차용은 보통 친근함이나 향수를 노린다. 하지만 에스파의 레트로는 이들을 우리 현실에 불시착한 다른 세상의 록스타처럼 보이게 만든다. 디즈니플러스의 ‘로키’가 정성을 쏟았던 레트로 비주얼이 해낸 업적과 같다. 인간적인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신비가 완전히 소거되는 것은 아니다. 이 팀은 환상을 벗지 않고도 인간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산화(Oxidation)란 금속이 공기와 접촉해 일으키는 변화다. ‘신맛’은 과거의 ‘쇠맛’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공기와 만나 산화한 결과다. 현실의 아티스트와 유리되는 스토리텔링 대신 감각 그 자체를 그리고 그 감각을 빚어내는 인간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에스파는 2024년에 세운 문법을 재구성했다.
그렇다고 ‘신맛’이 앨범 구석구석을 설명하거나 평가 기준을 세우는 마법의 단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맛’은 앨범 전체의 가치를 대변하고, 특히 타이틀 곡에서 가장 영리하게 빛난다. 그럼에도 정규 앨범이라는 대규모 작업에서 단일한 아이디어를 고수하는 것이 반드시 미덕은 아니다. 그래서 한 잔의 레모네이드가 ‘Armageddon’이라는 매운맛을 들이켜 본 사람의 갈증까지 풀어주는지 묻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LEMONADE’는 K-팝에 흔하지 않은 장면을 만들어낸다. 초년의 고난, 성장, 발견의 서사가 아니라, 이미 충분히 성공적인 팀에게 새롭게 시작되는 인간적 서사란 어떤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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