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남선우(‘씨네21’ 기자): ‘호프’의 마지막 장면까지 보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제목에 적힌 ‘희망’이란 괴생명체를 맞닥뜨린 주인공 일행의 생존 가능성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인류의 절멸 따위에는 별 관심 없이 달리는 외계인들의 태도에 더 가깝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언제나 쫓기는 쪽보다 쫓는 쪽이 더 활력 넘친다. 그들은 이루고 싶은 바가 분명할 테고, 도망자들만이 그 세부에 무지하다. 문제는 이 ‘알 수 없음’에 마음을 빼앗길 때 발생한다. 알 것만 같다는 짐작이 발목을 붙잡기 때문이다.
일례로 배우 황정민이 분한 파출소장 범석은 머리칼이 길고 몸체가 큰 괴물에게 총을 겨누다 그와 눈을 맞춘다. 찰나에 불과했을 아이컨택이 스크린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길게 늘어진다. 그사이 범석은 격발을 주저한다. 둘 사이에 어떤 교감이 이뤄진 것처럼 말이다. 추후 범석은 괴물이 울었다고 주장한다. 슬픔의 원인 제공자로 추정되는 인물을 나무라기도 한다. 나홍진 감독은 진위를 밝히는 데에까지 시간을 쓰지 않는다. 서로를 적으로 둔 존재들의 물리적 추격전에 충실할 따름이다. 이 선택과 집중은 의미를 갈구하는 관객을 조금 비웃는 것도 같다. 하지만 극 초반부 반복되던 카메라 무브를 떠올려보라. 햇살 아래, 괴수가 휩쓸고 간 자리는 아직 눈에 선하다. 그래서 ‘호프’라는 이름의 대낮 스릴러는 범석을 자꾸만 그늘진 실내에서 화창한 폐허로 안내한다. 그에게 허락된 진실이 여기 있다고 속삭이듯이. 이는 해석을 조소하는 제스처라기보다 독려하는 제스처가 아닐까. 몰입할 수 있는 혼란을 제공하는 일은 장르물의 본령이기도 하다. 미끼를 물지 말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나영석 VS 막내PD’
이민영: AI가 창작의 영역까지 넘본다는 위기감의 시대, 현장에서 26년을 보낸 연출자의 감은 여전히 유효할까. 채널십오야의 ‘나영석 VS 막내PD’는 그 질문을 승부의 형식으로 바꾼다. 종이와 펜만을 쥔 나영석 PD와 AI 제미나이를 파트너 삼은 막내 PD가 동일한 출연자로 예능을 만들고, 연출자를 가린 채 조회수·투표·좋아요를 합산해 승패를 가린다.
연출자의 이름이 지워지자 시청자는 ‘나영석의 맛’을 찾기 시작한다. 에스파의 카리나가 출연한 1차 대결이 그 예다. 맷돌을 갈아 콩국수를 만드는 ‘멧갈라 대신 맷돌갈라’에서는 ‘삼시세끼’를 닮은 힐링 감성부터 출연자에게 노동을 시키는 포맷까지 나영석 PD의 기획이 분명하다는 추리가 힘을 얻었고, 카리나가 이세계의 카페 알바생이 되는 ‘현실에서는 카리나인 내가 이세계에서는 21살 지민이?’를 두고는 나영석 PD가 하기에는 너무 트렌디하다는 감상과 세계관을 사랑해온 나영석 PD답다는 감상이 엇갈리며 댓글창을 달궜다. 그러나 연출자가 공개되자 모든 추리는 뒤집혔다. 3년 차 천지인 PD와 제미나이는 26년 치 레거시를 재현할 만큼 노련했고, 베테랑은 신입의 것이라 오해받을 만큼 새로웠던 것이다.
1차 대결의 비하인드에서 승패보다 선명해진 것이 있다. 두 기획이 같은 시선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천지인 PD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카리나라는 사람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을까였고, 그가 뭘 할 때 제일 즐거워 보이는지부터 찾아봤다는 나영석 PD의 시작점도 다르지 않다. 두 기획 모두 아이돌 ‘카리나’가 아닌 사람 ‘유지민’을 들여다보는 데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하와수(박명수·정준하)가 출연한 2차 대결, 서로의 악플을 예쁜 말로 되돌려주는 ‘내 친구의 악플을 소개합니다’와 ‘무한도전’의 추격전을 라이브로 옮긴 ‘실시간 추격 LIVE 술래잡기’에 이르면 시청자들은 연출자를 추리하는 대신 콘텐츠 자체의 재미를 논하기 시작한다. 이름값이 지워진 자리에 사람을 들여다본 기획만 남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블라인드 배틀의 진짜 목적지일지도 모른다.

I.M.F. - ‘Imported Mold’
김도헌(대중음악 평론가): 모방(Imitation), 변형(Modification), 날조(Fabrication)라는 농담. 혹은 1997년 외환위기 사태. 폐허, 밤섬해적단, 고쓰롭을 거쳐 장성건이 새로 조직한 밴드의 이름은 I.M.F.다. 베이스 민성식, 드럼 이세정, 기타 함석영과 함께 조직한 새 프로젝트는 한국 언더그라운드에서 열렬히 땀 흘리며 불온하고도 거친 음악적 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지난 6월 19일 발표한 첫 정규 앨범 ‘Imported Mold’는 그 정직한 기록이다. 작품의 소개에는 노이즈 록과 인더스트리얼을 비롯한 여러 이름이 따라붙는다. 매끈한 설명이다. 그보다는 기괴한 조립이라는 표현이 조금 더 마음에 든다. 밤섬해적단의 그라인드코어와 파워바이올런스가 선명한 가운데 누 메탈 스타일의 ‘다미’부터 사운드가든풍의 그런지가 들리는 ‘Hairytale’, 스래시 메탈 스타일의 ‘개미집’과 둠 슬러지의 림프 비즈킷 같은 ‘로치’가 과거와 현재를 어지럽게 뒤섞는다. 콘의 조나단 데이비스가 연상되는 주술적 중얼거림과 짐승 같은 스크리밍은 가사의 텍스트를 해체해 버린다. 포털 사이트에 써놓은 노랫말이 사실상 개별 곡 설명처럼 보일 지경이다. 유일하게 ‘들리는’ 곡으로는 ‘택시운전사’가 있다. 소설가 박완서의 한겨레 칼럼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공격적인 펑크 정신으로 시대를 들이받는 이 곡에서는 고쓰롭을 함께하는 이민휘의 무키무키만만수 시절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연상된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그의 잔인함이 진저리치도록 고독한 삶에서 비롯됐다며 창조주를 저주했다. I.M.F.는 반대다. 1인 프로젝트를 지속하다 전통적인 밴드의 육신을 건설한 장성건과 친구들은 스마트폰 화면 속 패션과 감각 대신 멱살을 잡고 땀내가 진동하는 비좁은 클럽 한가운데로 우리를 내동댕이친다. 소음발광, 피치트럭하이재커스, 향우회, 칩 포스트 갱, 철근 콘크리트… 익스트림과 노이즈, 개러지, 포스트 펑크의 젊은 포효가 인디 씬의 로컬리티와 결합해 거칠게 충돌한다. 수입된 곰팡이처럼 외로운 사람들이 가장 크게 낼 수 있는 시끄러운 소리로 연대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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