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더 많은 놀이가 필요하다!”
2026년 9월, 로블록스의 연례 개발자 컨퍼런스 ‘RDC 2026’에서 창업자이자 CEO인 데이비드 바수츠키(David Baszucki)는 “세상에는 더 많은 놀이가 필요하다!(The world needs more play)”라는 문장을 내걸었다. ‘더 많은 플레이, 더 많은 창작, 더 큰 성장’이라는 부제로 이어진 이 말은 로블록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를 드러내는 표어였다.

로블록스는 처음부터 ‘게임을 만드는 플랫폼’으로 제작되었다. 창업자들은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놀이가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 놀이를 만드는 플랫폼으로 로블록스를 제작했고, 지금까지도 더 많은 사람들이 놀이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획해왔다.
흔히 게임 제작은 뛰어난 소수의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여겨지곤 하지만, 애초에 게임을 만드는 것 자체가 놀이가 되는 로블록스 세계에서는 ‘제작자’의 문턱이 매우 낮다. 제작 도구인 '로블록스 스튜디오'는 무료로 제공되고, 서버 운영과 결제, 배포까지도 플랫폼이 맡기에, 제작자는 오직 무엇을 만들지에만 집중하면 된다. 여기에 AI 기능까지 더해지면서 이제는 코드 한 줄 몰라도 게임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문턱이 낮은 만큼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페르소나도 다양하다. 로블록스의 제작자는 170여 개국에 걸쳐 수백만 명에 이르고, 그 대부분은 스튜디오에 속하지 않은 개인들로 보고된다. 미국 제작자의 83%가 개인 개발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이 벌어들인 수익의 3분의 2가량이 실리콘밸리 같은 테크 중심지 바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한다. 10대에 독학으로 시작해 스튜디오를 차린 개발자가 있는가 하면, 게임 대신 아바타의 옷과 헤어스타일을 만들어 가상 패션 브랜드를 운영하는 제작자도 있다. 취미로 첫 게임을 올리는 아마추어부터 전문 스튜디오까지, 로블록스에서는 누구나 놀이의 제작자이자 참여자로서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 그 결과, 수많은 게임이 세계 곳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데, 2025년 로블록스에서 한 해 동안 활성 상태였던 게임만 1,400만 개가 넘는다.
그렇다면 창작이 곧 플레이가 되는, 제작과 플레이가 혼재된 놀이의 장에서의 게임의 모습은 어떠할까? 등장한 지 20년이 된 지금, 로블록스에서 놀이를 만드는 일은 이제 한 세대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유튜브가 영상 문화의 지형을 바꿔놓았듯, 제작과 플레이가 뒤섞인 이곳에서 게임의 모습 역시 변화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독특한 게임 다섯 개를 통해, 로블록스라는 창발의 현장에서 오늘의 놀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플레이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스틸 어 브레인롯(Steal a Brainrot)’: 밈을 훔치는 아이들
‘스틸 어 브레인롯’을 역대 최고 흥행작으로 만든 것은 새로운 규칙이 아니라 밈이었다.
맵 한가운데로 긴 런웨이가 지나가고, 그 위로 ‘브레인롯’ 캐릭터들이 줄지어 걸어간다. 플레이어는 이 중 하나를 사서 자기 기지에 세워두는데, 세워진 캐릭터는 매초 돈을 벌어준다. 처음 살 수 있는 건 초당 1달러를 버는 ‘누비니 피자니니’ 정도지만, 돈이 모일수록 더 비싸고 희귀한 캐릭터를 들일 수 있다. 한 푼 두 푼 모으는 것보다 더 빠른 길은 훔치기다. 플레이어는 잠기지 않은 다른 플레이어의 기지에 들어가 캐릭터를 훔칠 수 있으며, 이로써 기존의 예산으로는 불가능했던 비싼 캐릭터를 얻을 수도 있다. 원주인의 방망이에 맞으면 캐릭터가 도로 되돌아기에, 플레이어들은 요리조리 피해다니며 더 비싼 캐릭터를 서로 훔치면서 주고받는다.
이러한 ‘훔치기’라는 규칙은 전혀 새롭지 않다. 개발자 스파이더새미(SpyderSammy)는 이 게임이 ‘스틸 어 캐릭터(Steal a Character)’라는 기존 게임에서 출발했다고 밝혔다. 그는 ‘스틸어 캐릭터’의 규칙을 가져와 훔칠 대상만 AI 밈 ‘이탈리안 브레인롯’ 캐릭터로 바꿨는데, 호머 심슨이 있던 자리에 운동화를 신은 상어 ‘트랄랄레로 트랄랄라’가, 스티브가 있던 자리에 코코넛과 코끼리가 결합된 ‘코코판토 엘레판토’가 들어섰다. 규칙은 거의 같았지만, 인기 밈을 입은 게임은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2025년 5월 출시된 이 게임은 그해 10월 동시 접속자 2,540만 명을 기록하며 로블록스 역사상 최고 기록을 새로 썼다. 이처럼 로블록스에서 놀이는 규칙의 집합을 넘어선다. 같은 규칙에서 무엇이 터질지는, 그 위에 무엇을 얹느냐가 정한다.
‘스틸 언 에그(Steal An Egg)’: 훔치기의 무한 변주
‘스틸 어 브레인롯’이 기존 규칙에 밈을 얹었다면, ‘스틸 언 에그’는 규칙 자체를 한 단계 더 밀고 나간 사례다. 이 게임은 성공한 규칙이 다음 제작자들의 손에서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번에 플레이어들이 훔칠 것은 ‘알’이다. 게임에서, 맵 곳곳에 놓인 알은 ‘가디언’이 순찰하며 지키고 있다. 플레이어는 가디언의 동선을 살피다 알을 집어 들고 자신의 기지까지 달린다. 무사히 도착하면 알이 부화하고, 태어난 펫은 정원에서 매초 돈을 벌어준다. 같은 펫 세 마리를 합치면 더 높은 등급이 되고, 크기와 변이에 따라 같은 펫이라도 버는 돈이 달라진다. 번 돈으로는 달리기 속도를 키울 수 있는데, 속도가 빨라야 가디언을 따돌리고, 더 위험한 지역의 비싼 알에 도전할 수 있다.
이전의 훔치기 게임에서의 규칙은 ‘남의 기지를 터는’ 한 가지였다. 플레이어는 완성품인 캐릭터를 훔쳤으며, 캐릭터를 얻는 방법은 런웨이에서 구입하거나 다른 플레이어의 기지에서 훔치는 것이었다. 한편, ‘스틸 언 에그’는 보다 풍성한 구성을 보인다. 여기서 플레이어들은 NPC에게서 알을 훔칠 수 있으며, 훔친 알은 다양한 종류로 부화하며 성장시킬 수 있다. 훔치기는 그대로지만, 훔치는 이유와 방법이 훨씬 풍부해진 것이다. 이러한 게임성의 혁신은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는데, 2026년 7월 출시된 이 게임은 두 달여 만에 방문 74억 회, 동시 접속 최고 1,429만 명을 기록했다. 이처럼, 로블록스에서 성공한 규칙은 베껴지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제작자의 손에서 다른 규칙과 섞이며 또 한 번 진화한다.
‘입양하세요!(Adopt Me!)’: 플레이 현장이 곧 베타
플레이어와 개발자가 수직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세계인 로블록스에서 게임의 정체성은 출시될 때 정해지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그 안에서 무엇을 하며 노는지가 게임을 바꾸기도 한다.
지금의 ‘입양하세요!’는 펫을 키우는 게임이다. 알을 사서 부화시키면 펫이 태어나고, 플레이어는 배고픔, 목욕, 잠, 놀이처럼 펫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며 펫을 키운다. 돌봄이 쌓일수록 펫은 갓난아기에서 다 자란 모습까지 단계적으로 자라나고, 다 자란 펫 네 마리를 합치면 빛나는 ‘네온’ 펫이, 네온 네 마리를 합치면 ‘메가 네온’ 펫이 된다. 플레이어는 자기 집을 짓고 꾸미며, 펫과 아이템을 다른 플레이어와 맞바꾼다.
그런데 ‘입양하세요!’가 처음부터 펫 키우기 게임이었던 것은 아니다. 2017년 출시 당시 이 게임은 부모가 되어 아이를 입양하거나 아이가 되어 입양되는, 가족 역할극 놀이에 가까웠다. 당시 로블록스에서는 아이를 입양해 키우는 ‘입양·육아’ 역할극이 하나의 장르로 유행하고 있었고, ‘입양하세요!’도 그 흐름 위에서 출발했다.
지금의 ‘입양하세요!’를 만든 변화는 2019년 여름, 펫 입양 기능과 함께 찾아왔다. 플레이어들은 아이 대신 펫을 키우고 모으고 서로 바꾸기 시작했고, 펫 거래는 곧 게임의 핵심 문화가 됐다. 이에 따라 제작자들 역시 펫 수집과 교환을 중심으로 게임을 업데이트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펫 종류가 추가되었으며, 관련 거래가 늘어나자 안전 거래 등 더 체계적인 교환 시스템을 도입하기까지 했다.* 플레이어들의 관심이 게임의 정체성을 바꿔놓은 것이다. 이렇게 로블록스 세상 안에서 게임의 방향은 기획서가 아니라 플레이 현장에서 만들어진다.
*글로벌 기준이며, 국내에서는 거래기능을 이용할 수 없다.
‘99 나이츠 인 더 포레스트(99 Nights in the Forest)’: 완성 대신 연재를
‘99 나이츠 인 더 포레스트’는 게임을 완성품이 아닌 연재물로 운영할 때, 단순한 놀이가 어디까지 커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게임의 목표는 제목 그대로, 99일 밤을 살아남는 것이다. 실종된 아이 넷을 찾아 숲에 들어온 플레이어들은 숲 한가운데에 캠프를 차린다. 불이 꺼지면 어둠 속에서 사슴 괴물과 그를 따르는 컬트 교도들이 다가온다. 다양한 위협들이 찾아오기에, 플레이어들은 모은 자원으로 도구와 무기를 만들고, 친구들과 자원 수집, 전투, 건설, 정찰 등 역할을 나눠 하루하루를 넘긴다.
낮에 자원을 모아 밤을 버티는 구조는 ‘돈 스타브(Don’t Starve)’나 ‘마인크래프트(Minecraft)’에서도 익숙한 생존 게임의 오래된 문법이다. 다만, 이 게임을 구별하는 점은 업데이트가 쉬지 않고 이어진다는 데 있다. 3인으로 이루어진 개발팀은 거의 매주 새 직업, 위협, 시즌 이벤트를 더해왔는데, 핼러윈을 맞아 업데이트가 ‘1주 차’, ‘2주 차’로 나뉘어 나올 만큼, 업데이트는 빠른 주기로 이루어져왔다.
같은 규칙이지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변화되기에, 플레이어는 계속 같지만 또 다른 숲으로 들어가 99일간의 생존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25년 5월 출시된 이 게임은 동시 접속 최고 1,420만 명, 누적 방문 약 260억 회를 기록했으며, 2026년에는 해당 게임을 소재로 영화화가 결정되기까지 했다. 이렇게 단순한 놀이가 닳아 없어지지 않는 것은, 제작자들에 의해 끝없이 다시 쓰여졌기 때문이다.
‘ASMR 타워(ASMR Tower)’: 유행을 놀이하다
‘스틸 어 브레인롯’이 보여주듯, 익숙한 놀이도 새로운 소재를 만나면 전혀 다른 놀이가 된다. 규칙은 그대로여도, 그 놀이를 즐기는 이유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누구나 손쉽게 게임을 만들 수 있는 로블록스는 이런 만남이 가장 빠르게 일어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트렌드가 기존 게임의 규칙과 만나 새로운 놀이로 태어나고 있다.
장애물을 넘어 정상에 닿는 놀이는 ‘점프맵’이라는 말이 따로 있을 만큼 흔한 장르이고, 로블록스에서도 수없이 만들어져 왔다. 이 장르의 재미는 대개 정상에 오른다는 목표에 있다. 많은 플레이어들은 떨어지지 않으려 긴장하며 한 칸씩 오르고, 마침내 정상에 닿았을 때 성취감을 느끼고자 ‘점프맵’을 플레이하곤 했다. 한편 게임 밖에서는 정반대의 재미가 유행하고 있었다. 2026년 한국을 휩쓴 말랑이, 슬랑이, 왁뿌볼 같은 ‘촉감 놀이’ 장난감은 목표도 성취도 없이, 누르고 주무르고 부수는 감각 자체를 즐기는 놀이였다. 사람들은 장난감을 직접 만지거나, 그 소리를 담은 ASMR 영상으로 감각을 대신 즐겼다.
‘ASMR 타워’는 이 두 놀이를 하나로 엮었다. 규칙만 놓고 보면 이 게임은 평범한 점프맵이다. 플레이어는 색색의 층으로 나뉜 탑을 발판을 타고 끝까지 오른다. 차이는 발판의 형태와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에 있다. 플레이어가 한 칸 올라갈 때마다 왁뿌가 부서지며, 슬라임을 주무르는 소리, 말랑이를 누르는 소리,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영상으로 보고 듣기만 하는 것과 장난감을 직접 만지는 것 사이 어딘가에서, 이 게임은 탑을 오르는 것만으로 왁뿌를 부수고 슬랑이를 만지는 듯한 감각을 준다.
발판이라는 요소 하나가 바뀌었을 뿐이지만, 놀이를 즐기는 이유는 달라졌다. 정상에 닿기 위해 발판을 밟던 놀이가, 발판을 밟는 감각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정상에 닿는 놀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밈이든 감각이든,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것은 며칠 만에 로블록스의 놀이에 흡수되고, 이러한 ‘트렌디함’은 오래된 놀이에 새로운 재미를 더하며 놀이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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