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가는 데뷔 전부터 지역 힙합 크루에서 랩과 비트메이킹을 해왔고, 곡 전체를 자기 손으로 완결 짓는 프로듀서였다. 청소년 시기에는 이런저런 음악 작업으로 돈을 벌기도 했다 하니 어떤 의미에선 이미 프로페셔널했다고 보아도 될 듯싶다. 음악으로 ‘성공’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기로 한 결심부터 호기롭게 당시 빅히트엔터테인먼트(현 빅히트 뮤직)의 오디션 과제 곡 비트를 갈아엎어 새 편곡을 해갔다는 일화까지, 그의 첫 믹스테이프 수록 곡 ‘치리사일사팔 (724148)’을 들어보면 어린 시절의 그는 열의와 야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슈가는 신생 그룹 방탄소년단에 이미 일정 이상 완성된 음악가의 취향과 시선 그리고 고집을 가지고 왔다.
올해 7월 공개한 위버스 매거진 인터뷰 속 그의 분류법을 따르자면, 뮤지션 슈가에게는 여러 정체성이 있다. 그는 그룹 방탄소년단의 멤버 슈가이기도 하고, 믹스테이프를 내는 힙합 아티스트 어거스트 디(Agust D)이기도 하며, 외부 작업을 하는 프로듀서 바이 슈가(by SUGA)이기도 하다.
그는 바이 슈가로서 작업할 때는 “철저하게 상업적인 음악”을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상업적인 음악이란 성적도 성적이지만, 창작자의 에고를 의뢰인의 뜻보다 우선하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의아할 수 있다. 방탄소년단은 아이돌 씬에서도 특유의 ‘아티스트십’ 이미지가 강한 팀이고, 슈가는 믹스테이프 작업에서 보여준 진지함이나 멤버들의 증언 등으로 판단했을 때 팀 내에서도 음악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슈가는 방탄소년단 외의 뮤지션들과 협업할 때 한 사람의 프로듀서 혹은 작곡가로서 다가간다. 의뢰인의 요청에 충실한 직업인의 자세다. 물론 그렇다고 슈가라는 한 사람이 그가 아닌 아예 다른 무언가가 될 리는 없겠지만, 작업 시의 그런 세심한 노력이 결과적으로는 슈가로 하여금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게 한다.
바쁜 활동 중에도 꾸준히 발표되는 작업물을 들어보자면, 그가 음악을 듣고 쓰는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특히 최근 작으로 올수록 다양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힙합 비트메이커로 출발한 이래 본인의 주력이었던 분야는 계속 잘하되, 여러 가지 새로운 것에도 도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슈가가 외부에 처음 곡을 제공한 것은 2017년 발표한 수란의 ‘오늘 취하면 (Feat. 창모) (Prod. SUGA)’이었다. 그는 이전에도 방탄소년단 음반에 ‘고엽’처럼 미련이 남은 사랑의 끝을 그려낸 R&B/힙합 팝 트랙을 수록한 적 있었다. 트렌디한 드럼 위에 패닝을 잘 활용해서 공간감과 방향감을 흥미롭게 배치하고, 그 위에 음의 도약이나 낙폭이 드라마틱한 톱라인을 얹는 특유의 작법과 프로듀싱은 감성적인 노래라 해서 마냥 늘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슬픈 분위기가 죽어버리지도 않게끔 섬세하게 조정돼 있다. 오히려 이런 표현법이 이별 앞에 복잡해지는 감정을 다층적으로 그려낸다. 이는 헤이즈에게 제공한 ‘We don't talk together (Feat. 기리보이) (Prod. SUGA)’나 방탄소년단 ‘LOVE YOURSELF 結 'Answer'’ 앨범에 실은 솔로곡 ‘Trivia 轉: Seesaw’로도 이어졌다.
어딘지 노스탤직하고 헛헛한 느낌이 드는 올드스쿨 힙합 스타일 비트도 그의 주특기다. 2019년 작업한 곡 중에는 그가 어린 시절 힙합 가수의 꿈을 꾸게 만든 주인공 에픽하이에게 준 ‘새벽에’가 있다. 잠들지 못하는 늦거나 이른 시간에 듣기에 좋은, 너무 처지거나 들뜨지 않는 비트는 붐뱁 위에 기타나 피아노, 스크래치처럼 유행을 타지 않는 타임리스한 악기 소리들이 얽혀 달콤 쌉쌀한 인상을 준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방탄소년단의 ‘LOVE YOURSELF 承 'Her'’ 속 ‘Outro: Her’도 그랬고, 최근으로 와보면 어거스트 디 두 번째 믹스테이프 ‘D-2’의 ‘저 달’도 그런 느낌이다.
외국 가수에게 처음 제공한 곡은 할시의 ‘Manic’ 앨범에 실린 SUGA’s Interlude였다. 할시가 먼저 의뢰를 해 이루어진 협업이다. 할시는 전부터 슈가가 냈던 예민한 내면의 자아 성찰 곡들을 인상 깊게 들었다고 한다. 드럼보다는 섬세한 피아노가 리드해 나가는 차분한 전개는 이전에 ‘WINGS’ 앨범의 ‘First Love’의 초반과 닮아 있다. 이 정서를 좀 더 극적으로 끌어올리면 ‘MAP OF THE SOUL : 7’ 앨범의 ‘Interlude : Shadow’가 될 것 같다.
본격적인 장르 다변화가 느껴진 시점은 2020년 아이유에게 제공한 ‘에잇 (Prod.&Feat. SUGA of BTS)’부터였다. 아이유의 ‘나이 시리즈’ 세 번째를 장식한 이 곡은 슈가의 프로듀싱으로 듣게 될 줄 몰랐던, 기타가 주가 되는 팝 록이었다. 브리지까지 제대로 구성하는 평소의 정석적 가요 작법에서 벗어나 곡의 길이를 3분 안쪽으로 파격적으로 줄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즐겨 쓰는 특징이라고 보아도 될 아득한 공간감에서 오는 아련함이 돋보인다. 가장 최근에 나온 ØMI의 ‘You (Prod. by SUGA of BTS)’ 역시 이 영향권 아래 있는 것으로 들린다. 어쿠스틱 기타와 휘파람이 초반부터 노래의 무드를 결정하는, 드라이브에 잘 어울릴 만한 노래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며 기타를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 영향인지 최근에는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 사용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콜드플레이와의 신곡은 우주적인 분위기의 원곡과는 대비되는, 해저를 연상시키는 트로피컬 하우스 스타일로 편곡했다. 2017년쯤 플룸(Flume)을 즐겨 듣는다고 말했던 그는 시간이 지나 이렇게 자기 식으로 소화한 EDM 사운드를 대중 앞에 선보였다. 삼성 갤럭시의 ‘Over the Horizon’을 큰 서사의 영화음악처럼 장대한 스케일의 인스트루멘탈로 편곡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화려한 일렉 기타 솔로는 데뷔 초의 ‘Tomorrow’부터 꾸준히 밀어온 그의 취향이기도 하다. 이렇듯 프로듀서 슈가의 음악 세계는 자기 색깔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다방면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음악 커리어를 시작하며 그는 래퍼 겸 프로듀서가 될 미래를 꿈꾸었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에 오디션을 볼 때만 해도 그랬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그는 ‘작곡가가 되려다 아이돌이 된’ 사람이다. 물론 처음에 아이돌이 되기로 결심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결국 방탄소년단으로 데뷔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아이돌이 되는 길이 그의 음악 인생을 보다 멀리까지 갈 수 있게 만들어줄 거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은, 방탄소년단이 이렇게나 많은 성과를 이룬 지금은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다.
외부에 곡을 제공하는 그를 보면 ‘작곡가가 되려다 아이돌이 된’ 그의 평행 세계의 삶을 조금 엿볼 수 있다. 아니, 평행 세계라고 굳이 표현할 필요 없이, 그는 긴 시간에 걸쳐 자신이 꿈꾸던 일들을 점진적으로 실현해왔다. 그가 수란에게 ‘오늘 취하면 (Feat. 창모) (Prod. SUGA)’을 제공한 것은 2017년, 방탄소년단으로 데뷔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어린 시절 음악가의 꿈을 꾸게 한 에픽하이와 프로듀서로서 작업을 하기도 했고, 세계적인 밴드와 컬래버레이션하며 리믹스 편곡을 맡기도 하는 등, 그의 활약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지금껏 전업 작곡가였다면 하지 않았을 많은 활동과 스케줄을 소화해냈다. 무대에서는 매력적인 라이브와 퍼포먼스를 뽐내고, 팬들과는 정답게 소통하며, 자체 예능에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특히 어린 시절 어렵게 커리어를 쌓으며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는 든든한 팬들이 있기를 소망했다는 그는, 아이돌 프로듀서로 그 꿈을 이루어 프로듀싱을 하는 아이돌로도 또 수만 관중 앞에서 다수의 공연을 경험한 세계에서 몇 안 되는 프로듀서로도 사랑받고 있다. 한 명의 슈가 안에 방탄소년단 멤버 슈가와 힙합 하는 어거스트 디와 프로듀서로서 바이 슈가가 33.3%씩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는 100%의 아이돌, 100%의 힙합 아티스트, 100%의 전업 프로듀서가 된다. 인생의 변수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줄지 모를지라도, 사랑하는 것에 열망을 놓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면 어딘가 의미 있는 곳에 닿게 되리라는 기대가 틀리지 않음을, 그런 방식으로 성장하는 인간을, 우리는 슈가를 통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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