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 요리 계급 전쟁’(넷플릭스)
윤희성: 기준은 맛이다. 유명 셰프를 ‘백수저’, 재야의 고수를 자처하는 요리사를 ‘흑수저’로 나누어 경쟁 구도를 만드는 ‘흑백요리사 : 요리 계급 전쟁’의 규칙은 의외로 명료하다. 정해진 시간 안에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이기는 게임. 양 팀의 인원을 동일하게 맞추기 위해 진행된 일종의 선발전이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빼면 옷 색깔을 맞춰 입은 각자의 소속이 남을 뿐이다. 특별히 더해지는 특혜나 핸디캡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맛’이 곧 점수라는 프로그램의 방향을 극대화하기 위해, 양 팀의 선발 대결은 심지어 눈을 가린 채 심사가 진행된다. 파인다이닝이 줄 수 있는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서빙하는 직원들에게 발레 교습을 권할 정도로 완벽에 집착한다고 알려진 셰프 안성재와 최상의 맛에 천착하기보다는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는 요식업 사업가로 널리 알려진 백종원이 이 경쟁의 심사위원이라는 점은 그래서 이 프로그램의 시작이자 핵심이다. 어쩌면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요리를 이해하고 연구해온 두 사람이 같은 질문에 같은 답을 내놓아야만 승자가 가려진다. 그래서 어느 한 입이 더 맛있었나요.
담음새조차도 심사에 개입할 수 없이 극도로 단순해진 게임의 규칙 안에서 경쟁은 자칫 첨예하게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흑백요리사 : 요리 계급 전쟁’은 맛이라는 절대 가치, 그 위에 요리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존중을 올려 놓기를 잊지 않는다. 곤룡포를 입고 심벌즈에 비빔 문자 모양으로 밥을 담아내는 비빔밥 요리사의 탈락 이유는 오직 ‘짜다’는 객관적인 평가일 뿐이다. 급식 식판에 담긴 음식을 맛보고 만족했음에도 혹시 추억이라는 심리적 요인이 개입되었을까 봐 평가를 보류하는 심사위원의 태도는 냉정함이 아니라 요리를 만든 사람의 재능 자체를 인정하고 싶은 깊은 배려다. 그리고 차곡차곡 심사위원의 입맛에 대한 신뢰를 쌓은 방송은 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장비를 동원해서 독특한 요리를 만들어낸 유투버 승우아빠와 누구나 맛을 짐작할 수 있을 무조림을 요리한 셰프 최강록의 대결에서 마침내 이 기획의 본질을 드러낸다. 계급이나 흑백의 구분 같은 장치는 어쩌면 ‘맛에 영향을 줄 수 없이 그릇에 올라간 꽃’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우직하게 수련의 시간을 거친 사람들이 정직하게 펼치는 대결. 보는 것만으로도 ‘먹어 보고 싶다’고 한마디 거들 수 있는 화면. 오랫동안 검증받아 온 레시피야말로 이 프로그램의 가장 든든한 출발선이다. 가장 무서운 맛은 ‘아는 맛’이라고 했던가. 요리 예능을 섭렵해온 마니아들이라면 더더욱 외면할 수 없는 바로 그 아는 맛이 오래간만에 간판을 내걸었다.
애니메이션 영화 ‘룩백’
백설희: 지난 9월 5일, 애니메이션 영화 ‘룩백’이 메가박스에서 단독 개봉했다. ‘체인소 맨’으로 잘 알려진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단편만화 ‘룩백’을 원작으로 삼은 이 작품은 이미 영화적 연출로 유명한 원작을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칸과 칸 사이 빈 공간에 동화(動畵)를 채워넣는다. 우리가 만화책 ‘룩백’을 보며 상상하던 모습 그대로, 아니면 그 이상으로. 하지만 원작을 보지 않았어도 ‘룩백’은 그 자체로 충분히 훌륭한 영화다. 후지노가 그린 네 컷 만화의 역동성이나 마지막 장면에서 계속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 등 만화에서 적당히 생략한 디테일을 채우는 한편, 쿄모토를 만나고 돌아오는 후지노가 비를 맞으며 춤을 추는 모습처럼 과잉된 부분을 더 살림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을 폭발시키게 만든다.
제작을 담당한 스튜디오 두리안은 그간 제작 협력 등을 도맡아 해온 하청 스튜디오였으나, ‘룩백’을 시작으로 장편 애니메이션 원청 제작에 뛰어들었다. 규모는 작지만 ‘두리안’이라는 이름처럼 개성이 강한 향과 모두를 중독시키는 고퀄리티의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룩백’을 보면 그 첫걸음을 단단히 내디뎠다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를 믿고 뒤를 맡긴 경험이 있다면, 누군가의 등을 보며 힘을 냈던 경험이 있다면, 아니 무언가에 푹 빠져 열중했던 시절을 돌아보며 그리워했던 경험이 있다면 당신은 이 작품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스노우 헌터스’ - 폴 윤
김복숭(작가) : 정체성과 핵심이 떠나와야만 했던 곳에 있었던 이는 낯선 곳에서 어떻게 마음을 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폴 윤의 단편소설 ‘스노우 헌터스’의 주인공 요한은 브라질로 이송된 20대 한국 난민으로, 항구 마을의 견습 재단사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한다. 이야기는 수년에 걸쳐 펼쳐지며, 시간이 흐르면서 요한의 상사이자 멘토인 기요시는 그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관리인과 노숙자 자녀 두 명의 이야기도 그 곁에서 펼쳐진다. 하지만 트라우마로 인해 세상에 마음을 열지 못하는 요한에게는 이 모든 것이 길고 느린 과정이다.
소설은 요한이 정착하게 된 새로운 나라에 대한 조용한 묘사와 그의 심리에 대한 통찰을 다소 절제된 관점으로 풀어나간다. 대화는 거의 없지만, 간결하면서도 아릿한 힘이 있는 문장들은 독자들에게 마치 시를 읽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알베르 카뮈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의미를 찾는 것만 같은 간결하면서도 인상주의적인 스타일의 이 책은, 인간이 사랑과 희망을 통해 주변 세계와 천천히 다시 연결되는 이야기를 마치 명상의 한 구절처럼 펼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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