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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은, 김도헌(대중음악 평론가), 김복숭(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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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고’ (뜬뜬)
김리은: 어느새 여행이 선사하는 이방인으로서의 감각은 희귀한 가치가 되었다. 어떤 곳이든 마치 알던 것처럼 누비게 하는 구글 맵과 번역 앱들, 그리고 평균적인 선호도를 압축한 패키지 여행까지. ‘풍향고’는 단 하나의 룰을 추가하면서 이 모든 전제를 초기화한다. 앱을 사용하지 말 것. 이 설정 앞에서 예능인 유재석, 지석진, 양세찬 그리고 영화배우 황정민은 온전히 이방인으로서 베트남에 놓이게 된다. 제작진은 이들의 더 나은 여행을 위해 답사와 여행책, 블로그 후기를 종합한 ‘족보’를 제공하지만, 눈앞에 새롭게 등장하는 낯선 장소들이 제시하는 매력적인 선택지와 각종 변수 앞에서 네 명의 계획은 자꾸 무력화된다. 베트남 현지 호텔의 직원이 ‘런닝맨’으로 알려진 지석진을 알아보며 반가움을 표해도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노고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프로그램 제목 그대로 ‘느낌대로, 바람이 가는 대로’ 가는 여행의 자유를 누리기에 앞서, 네 명은 콘텐츠 촬영이라는 목적을 위해 매 순간 같은 그림 안에 놓여야만 한다. 그러나 끝없는 충돌과 변수의 끝에 네 사람이 발견하는 것은 결국 서로라는 새로운 세계다. ‘국민 MC’로서 항상 프로그램의 흐름을 주도해왔던 유재석은 공항에서 모바일 QR코드를 요구받자 당황하지 말자고 이야기하지만, 이를 풀어주는 지석진의 장난에 사실 본인이 당황했음을 솔직하게 토로하며 습관적인 부담감을 내려놓는다. 늦은 시간 카페에서 배고픔을 토로하는 지석진의 말에 네 명은 서로의 다른 식습관을 알게 되고, 제작진이 제공한 족보를 손에 쥐고 다니는 황정민의 모습에서 타인의 노고를 기억하는 배려심을 발견한다. 네 명의 의견이 좀처럼 모이지 않자 가위바위보로 돌아가며 리더를 하자는 양세찬의 제안은 바로 수용되고, 유재석은 막내로서 상황을 세심하게 살피는 양세찬의 성숙함을 알아보고 칭찬한다. 택시를 타는 것도, 장소를 찾는 것도 그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좌충우돌 속에서 네 명은 더운 날 길을 헤맨 끝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시원함을, 현지인들의 친절에 대한 감사함을 깨닫는다. 요컨대 ‘풍향고’는 방구석에서도 세계 곳곳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착시에 가려진,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에 대한 감사를 꺼내 보인다. 단 하나의 전제를 비튼 것만으로도 모두가 잊고 있었던 세계가 다시 열렸다.

‘포인트 니모’- 윤하
김도헌(대중음악 평론가): 윤하의 정규 7집 ‘GROWTH THEORY’의 리패키지 타이틀 곡 ‘포인트 니모’는 지구의 해양 도달불능점에 쓰임을 다한 인공위성이 추락해 생을 마감하는 무덤 궤도에서 영감을 얻었다. 고요한 우주를 그린 전작 ‘END THEORY’에 이어 드넓은 대양을 바라보며 제작한 작품은 바다의 나무 ‘맹그로브’로부터 출발해 개복치의 삶을 은유한 ‘태양물고기’, ‘코리올리 힘’과 ‘로켓방정식의 저주’ 등 지구 지형과 역학, 천문학의 단어를 빌려 우리의 보편적인 삶을 투영하는 환상의 모험기다. 소녀와 태양물고기의 여행은 바다로 가라앉은 인공위성의 무덤 ‘포인트 니모’에서 끝을 맺는다. 

고요한 우주의 궤도에서 푸른 별을 돌며 임무를 수행하던 구조물이 가장 외딴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잠들어가는 풍경은 얼마나 비극적이고도 아름다운가. “너와 나와 하늘과 바다”만 존재하는 진공의 공간에서 아쉽고도 고독했던 그러나 후회는 없었던 삶을 돌아본다. 윤하는 죽음의 심해를 생명의 바다로 바꿔 광활한 거시 세계의 우주를 향한 물줄기를 내뿜는다. 청량한 기타 연주와 후련한 보컬로 찰나의 미련도 남지 않게 깊이깊이 가라앉혀 잠재운다. 그땐 그게 정답이었다고, 수고했다고 격려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과 깊은 감동, 뜨거운 사랑을 샅샅이 간직하자고. 그렇게 서로를 구해내자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고,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을 들으며 나는 ‘포인트 니모’를 생각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한 해의 끝에 마음이 불안해질 때마다 이 노래를 거듭 들었다. 연말에 만난 윤하는 어른이 되어 갈수록 더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은 마음을 앨범에 담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도와야 한다. 그렇게 서로를 구해야 한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 박서련
김복숭(작가): 마법소녀, 어린 시절 꿈의 소재(이전에 다뤄졌던 관련 글을 더 읽어보고 싶다면 이곳으로). 하지만 어른이 되어보니 인생이 그렇게 마법같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 박서련의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는 흔히 다뤄지는 그 소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뒤집는다.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 누구나 이 책의 이름 없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번역가 안톤 허의 인상적인 번역 작품 목록에 추가되어, 최근 영어로도 출간되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Z세대에 거의 가까운) 밀레니얼 세대의 한 여성. 이야기는 그가 코로나19 이후 빚에 허덕이며 물에 빠져 삶을 끝내려 할 때, 하얀빛의 한 마법소녀로부터 구해지고, 자신도 마법소녀가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취업 박람회부터 카드 빚,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것까지, 마법소녀가 된다는 것은 만화책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다. 정말 피곤하고 가끔은 불안해지는, 마법소녀는 직업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마법소녀가 된 사람들이 실은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마법소녀들이 연대하며 어떤 존재(스포 아님)와 맞서 싸우는지를 생각해보면, 이 책은 우리가 처한 사회가 거부하는 크고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에 대한 한 마디이기도 하다는 건 금세 알 수 있다. 비록 책의 결말은 조금 갑작스럽긴 하지만, 얼마 전 출간된 속편 ‘마법소녀 복직합니다’를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니 다행이다. 약간의 마법, 그리고 큰 인내는 결국 승리한다는 것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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