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가게’ (디즈니+)
이희원: “깨어날까요?”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환자들이 살 수 있느냐 묻는 이에게 간호사 영지(박보영)는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환자분들 의지에 달렸죠.”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이 말은 때로 너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병상에 누워 홀로 싸워야 하는 환자에게 의지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는 정말 혼자만의 싸움인 것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헤매는 이들이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다. 반드시 ‘본인의 의지’로 조명가게에 찾아와 자신의 조명을 찾을 것. 김희원 배우의 첫 연출작이자, 강풀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조명가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헤매는 이들이 어떻게 다시 빛을 찾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조명가게의 규칙과 달리, 절대 거스를 수 없을 것 같은 사후 세계의 규칙에 균열을 내는 것은 타인의 의지다. 한 엄마는 딸을 살리기 위해 매일 조명가게에서 조명을 사 오라고 딸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한 여자는 조명가게 근처에도 다가서지 못하는 연인의 찢어진 허리를 묵묵히 이어 붙이며 일으켜 세운다. 한 남자는 골목에 주저앉아 모든 걸 포기한 학생을 업어 가게 앞에 데려다 놓으며 ‘본인 의지’인 척 조명을 찾으라고 힌트를 주기도 한다. 그렇게 딸은, 연인은 그리고 주저앉았던 학생은 모두 타인의 간절한 마음 덕에 다시 살아난다. 인간의 사랑과 연대가 ‘생과 사’의 법칙을 넘어선 예외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 말미에 간호사 영지는 다시 고쳐 말한다. “어쩌면 그 의지라는 게 혼자만의 것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둠이 드리운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조차 서로를 돕고 살리려는 이들의 이야기가 모여 빛이 된다. 어두운 골목, 유난히 빛나는 조명가게를 지키는 주인장 원영(주지훈)의 대사처럼. “어디든 사람 사는 세상 아니겠어요?”
소녀시대 - ‘다시 만난 세계’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12월 3일 이후, 모든 주의력이 한 가지 뉴스로 빨려들어가 있다. 연말 시상식보다 거리에서 들려온 K-팝이 더 큰 화제가 되었다. 위기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집회 현장에서 울려 퍼진 곡들은 신곡보다는 이미 널리 알려진 곡들이었다. 특히 2007년에 발매된 소녀시대의 데뷔 곡 ‘다시 만난 세계 (Into The New World)’는 그 상징성을 더해가고 있다. 곡 자체가 갖는 힘도 분명 있다. 메이저인 듯 희망 차면서 뜯어보면 마이너인 감성적인 곡조와 심장을 울리는 드럼, 서로 힘이 되어주고자 하는 소녀들의 다짐을 담은 가사가 함께 부를수록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2000년대 퀴어 퍼레이드가 당대의 유행가 K-팝을 인권을 외치는 거리의 음악으로 소환하여, 2016년 박근혜 탄핵 집회까지 스노우볼이 되어 굴러간 이화여대 농성이 있었고, 근년의 여럿 투쟁 현장에서 열린 ‘슬픔의 K-팝 파티’ 그리고 마침내 2025년 남태령에 고립된 농민 활동가들을 지키기 위해 혹한의 조건에도 응원봉을 들고 모인 젊은 여성들의 밤샘 농성까지. ‘다시 만난 세계’는 시대의 굵직한 장면에서 불리며 연대의 송가가 되어 간다. 현대의 대중음악에 분명 산업적 한계도 있다. 그러나 그 본질, 음악만큼은 분명히 대중(People)의 것이 되어버리는 순간들이 있다.
‘100가지 식물로 읽는 세계사’ - 사이먼 반즈
김복숭(작가): 자연과 (동물을 포함한) 인류가 서로 얽혀 있는 방식에는 본질적으로 매혹적인 무언가가 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끼에서부터 풍경을 압도하는 우뚝 솟은 나무까지, 자연 속 식물의 세계는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인류의 문화를 조형해왔다.
사이먼 반즈가 쓴 ‘100가지 식물로 읽는 세계사’는 짤막한 100개의 챕터로 구성되었다. 각 챕터는 마치 나무껍질을 벗겨내듯 특정 식물 혹은 곰팡이가 인류의 역사와 어떻게 얽혀왔는지를 탐구한다. 식물이 우리의 옷에 어떤 혁명을 가져왔는지(면), 우리의 정신을 어떻게 재구성하고(커피)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좋은 예: 페니실린/나쁜 예:독) 등, 작가는 문학에서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참고 자료를 통해 식물에 대한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볍고 생동감 있게 다룬다. 아름다운 사진과 예술로 가득한 책장을 펼쳐보면, 지루한 역사 이야기나 과학적인 심층 분석에만 치중하지 않고 통찰력 있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생각보다 금세 책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경이로운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고 있는 우리가 ‘인간의 통제 욕구’를 넘어서서 이런 자연의 선물을 잘 보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메시지는 덤이다.
선물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오늘 소개하는 책 ‘100가지 식물로 읽는 세계사’는 늦은 크리스마스 선물로도 꽤나 좋은 책이지 않나 싶다. 선물 받을 사람이 동물에 더 관심이 있다면, 늦어서 미안함을 담아 작가가 쓴 이 책의 동물 버전(‘100가지 동물로 읽는 세계사’)도 함께 말이다. 언젠가 ‘100가지 곤충으로 읽는 세계사’를 선물할 수 있을 때가 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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