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증외상센터’ (넷플릭스)
박수민: “우리는 계속 뛰어야 한다. 환자의 심장을 뛰게 하기 위해.” ‘신의 손’이라 불리는 외과 전문의 백강혁(주지훈)은 병원 부임 첫날부터 응급실을 누비고 사고 현장에도 직접 달려간다. 그는 매 위기 상황 속에서 집도의로서의 결단과 압도적으로 뛰어난 수술 능력으로 기적처럼 생명을 구해내고, 환자의 생존보다 이익을 우선시하는 시스템의 부조리에도 유쾌하게 맞서며 문제를 해결한다. 이처럼 극적인 장면들은 메디컬 히어로물이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증외상센터’는 “중증 외상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당연한 명제를 통해 보는 이에게 현실감을 일깨운다. 권력을 등에 업고 백강혁을 핍박하던 항문외과 과장 한유림(윤경호)이 딸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앞에서 무너져내리듯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중증 외상 환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건 ‘슈퍼히어로’ 같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도덕성과 연대감으로 뭉친 개인들이다. 그렇기에 작중 백강혁이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된 항문외과에 있던 양재원(추영우)에게 중증외상센터의 펠로우로서 함께하자고 설득하며 전한 ‘휴머니즘’은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에 대한 그의 사명인 동시에 우리 사회가 함께 나누어야 할 보편타당한 책임을 환기한다. 적어도 돈 때문에 환자를 포기하거나, 살릴 수 있음에도 놓아버리는 죽음은 없어야 한다는. 그래서 기피 분야인 외상외과에서 5년 차 근무만으로도 시니어가 되어버린 간호사 천장미(하영)가 양재원에게 건넨 “근데 우리, 뭐 인정받자고 하는 거 아니잖아요.”라는 위로는 사실 현실을 향한 날카로운 경종이기도 하다. 매출이나 실적처럼 가시적인 성과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어떻게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가.

‘벌집의 정령’
배동미(‘씨네 21’ 기자): 스페인 카스티야 평원의 어느 시골 마을. 다섯 살 아나(아나 토렌트)는 마을회관에서 ‘프랑켄슈타인’ 영화를 본다. 아나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지만, 영화가 다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날 밤 언니에게 “괴물은 왜 그 애를 죽인 거야? 또 사람들은 왜 괴물을 죽였어?”라고 묻는다. 언니도 영화를 다 이해할 수는 없었기에 괴물이 영혼이라며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다. “괴물도 죽지 않았고 아이도 죽지 않았어. 영화는 다 가짜거든. 다 속임수야. 거기다 그 남자가 살아 있는 걸 봤어. 마을 근처 내가 아는 곳에서. 사람들은 못 봐. 밤에만 나타나니까. 영혼들은 몸이 없어. 그래서 죽일 수 없어. 밖에 나갈 때 변장하는 거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서사가 되고, 서사는 다시 삶에 영향을 끼친다. 아나는 하굣길에 언니가 말한 집에 들러 괴물과 만나길 기대한다. 그리고 어느 날, 그곳에서 군복을 입은 남자와 마주친다. 그는 언니 말처럼 괴물의 현신일까. 아니면 도망 중인 탈영병일까. 물론관객은 후자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린 아나는 괴물과 드디어 만났다고 여긴다.
스페인을 넘어 세계 영화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벌집의 정령(1973)’을 이해하기 위해선 영화 바깥을 경유해야 한다. 영화는 1940년 스페인을 배경으로 삼는데, 3년에 걸친 처참한 내전이 끝나고 독재자 프랑코가 집권한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투우장에 수천 명을 몰아넣은 학살이 자행되고 실종자만 11만 명에 달할 만큼 스페인 사회는 내전으로 얼룩졌으나, 그 상처는 독재자에 의해 얼기설기 기워진 채로 회복되지 않았다. 프랑코가 동시대 독재자인 히틀러와 무솔리니보다 길게 35년 넘게 집권하면서 스페인 내에서는 내전의 아픔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짓눌린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영화 속 아나의 부모가 긴 침묵과 깊은 우울에 빠지는 건 이 때문이다. 직간접적으로 그 영향을 받는 아이들은 위험한 놀이에 열중하고 자기들만의 묘한 상상의 세계에 깊이 들어간다. ‘벌집의 정령’은 프랑코 집권 말기인 1973년 전 세계에 공개돼 내전 후유증을 은유적으로 그렸다는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영화제와 예술영화관 기획전을 통해 소수에게만 가닿았다. 그 ‘벌집의 정령’이 5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올해 처음으로 국내 개봉한다. 어떤 영화는 한 달이면 잊히곤 하지만, 어떤 영화는 이처럼 긴 시간을 이겨낸다.

호시노 겐(星野 源) - ‘Eureka’
황선업(대중음악 평론가): 호시노 겐이 올봄에 선보일 7년 만의 정규작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쉽게 예측하기는 어렵다. 일단 그는 앨범 ‘POP VIRUS’와 해당 투어를 끝으로 ‘팝스타 호시노 겐’이라는 자아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 선보인 싱글들은 단어 그대로 ‘종잡을 수 없는’ 느낌이 강하다. 비디오 게임과의 접점을 통해 소리를 재탐구한 ‘創造(Create)’, 레트로한 비트와 신시사이저를 동반해 단출한 팝 공식을 제안하는 ‘不思議(FUSHIGI)’, 과격한 사운드 활용을 통한 프로그레시브적 접근이 인상적인 ‘Cube’, 치밀한 비트의 배열을 통해 독자적인 신스팝 제조에 골몰한 ‘異世界混合大舞踏会(I Wanna Be Your Ghost) (feat. おばけ(Ghosts))’, 1980년대 팝과 뉴잭스윙의 유산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光の跡’까지. 그가 몇 년 동안 선보인 작품들에 일관성은 좀처럼 목격되지 않는다. 이처럼 그는 자신을 규정짓는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방법론을 거듭 시도해왔다.
‘Eureka’는 그 여정 속에서 내미는 중간 결산과 같은 노래다. 피아노 연주를 중심으로 심플하게 쌓아 올린 합주는 비워 나가는 과정을 지속해왔던 그의 지향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상실과 회복을 반복하며 자신을 찾아나가는 것’이라는 메시지는 그간 자신의 음악 세계를 해체 및 재구축해온 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비록 결과물을 만들어 나가는 방법과 전하고자 하는 생각은 이전과 달라졌지만, 그가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자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노래를 듣고 어렴풋이 하게 된다. 어떤 식으로 접근하더라도 ‘호시노 겐만의 팝론’은 퇴색되거나 빛바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 과정. 꼬박 4년, 그는 겨우내 “Eureka!”를 외치며 대중들에게 선보일 새로운 음악적 자아에 대한 준비를 마쳐가고 있다. 새 앨범에 대한 귀중한 힌트가 될, 온기 넘치는 한 곡.
‘이것이 새입니까? : 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 - 아르노 네바슈
김복숭(작가): 때는 1927년, 루마니아의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흔히 훈련받던 전통이나 억압에서 벗어난 한 악명 높은 작품을 조각했다. ‘공간 속의 새’라는 이름의 이 작품이 주목받은 이유는 미국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전시회에 전시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전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이 추상적인 조각품은 세관에 의해 주방 도구 같은 일상적인 물건으로 분류되어 무거운 수입 관세가 부가되었다. 이에 연방 변호사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지식인들이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질문 아래 법원에서 마주 모이게 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결정은 법원의 몫으로 남았다.
아르노 네바슈의 그래픽 노블 ‘이것이 새입니까? : 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흥분과 불안이 공존하던 100년 전 뉴욕. 그리고 파리에서 현대미술 안에서 시대의 형식과 정서를 포착하고자 한 조각가 브랑쿠시. 그의 마지막 추상 조각 시리즈는 그 당시 모더니즘에 대한 인식을 아직 따라잡지 못했던 미국에서는 예술의 고전적 관념에는 맞지 않는 작품이었고, 조각가는 파리의 동료들과 함께 판결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재판 소식을 접하며 판결을 기다린다.
환상적인 주제만큼이나 추상적인 스타일의 삽화와 함께하는 작가 아르노 네바슈의 책은, 비록 그래픽 노블의 형태이지만 웹툰의 명확하고 깔끔한 대사에 익숙한 우리 세대에게는 모든 페이지의 세세한 의도를 해석하는 것이 그저 쉽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조금은 복잡할 수도 있을 각자의 해석 과정 자체가 이 책의 요점을 완벽하게 뒷받침하는 건 아닐까?
- 'BYOB', 엔하이픈 제이크의 첫 단독 예능 나들이2025.01.24
- ‘어색하지만 괜찮아 Returns’, NCT의 ‘네오’한 우정 실험2025.01.17
- ‘조명가게’, 삶의 의지에 대하여2025.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