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여성 래퍼의 새로운 전성기를 알리는 해였다. 대략 2000년대 중반부터 급속도로 비좁아졌던 여성 래퍼의 입지는 2020년대를 기점으로 다시금 넓어지기 시작했다. 니키 미나즈(Nicki Minaj)와 카디 비(Cardi B)처럼 암흑기 속에서도 트렌드를 주도한 랩스타는 물론, 실력과 개성을 겸비한 래퍼들이 주류와 인디에서 대거 등장한 덕분이다. 메건 디 스탤리언 (Megan Thee Stallion), 랩소디(Rapsody), 아이스 스파이스(ice spice), 라토(Latto), 글로릴라(GloRilla), 플로 밀리(Flo Milli), 리틀 심즈(Little Simz) 등 많은 이름이 떠오른다. 그리고 여기 플로리다주 탬파 출신의 도이치(Doechii)*가 있다.
* 현지의 일부 매체는 'Doechii'의 이름에 관하여 'Doe'를 '도우'라는 발음 기호로 표기하여 '도우치'라 알려주기도 한다. 'Doe'가 돈을 뜻하는 속어 '도우(Dough)'의 슬랭식 표기이기도 하다. 적확하게 말하자면, '도우치', '도치', '도이치' 사이에서 발음되며 '도우치'에 가장 가깝지만, 한국의 음악 팬 사이에서는 '도이치'로 통용되는 사례가 많아 혼란을 피하고자 '도이치'로 표기함을 밝힌다.'
끊임없이 진화하며 새로운 목소리를 찾는 현대음악계에서 도이치는 그 중심에 서 있는 래퍼 중 한 명이다. 독창적인 예술성과 강렬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힙합의 전통적인 틀 안팎을 넘나들며 많은 이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중이다. 또한 음악을 통해 개인적 서사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며 세대와 젠더를 초월한 공감과 혁신을 이루고 있다. 발레, 체조, 연기 등 다양한 예술 활동에 몰두하며 성장한 그녀가 시와 랩을 쓰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시절부터다. 이후 음악에 본격적으로 몰두하면서 2016년 사운드클라우드에 ‘Girls’라는 곡을 공개했고, 3년 뒤 2019년엔 믹스테이프 ‘Coven Music Session, Vol. 1’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데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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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n Music Session, Vol. 1’의 음악과 당시 도이치가 선보인 DIY 홍보 콘텐츠만 봐도 그녀의 남달랐던 예술적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장르 융합에 대한 이해도와 창작력, 랩 못지않게 탁월한 노래 실력, 심도 깊은 주제를 스토리텔링으로 엮어내는 재능이 빛났으며, 관련 영상 콘텐츠에서 비주얼과 미학에 대한 도이치의 높은 관심과 감각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Coven Music Session, Vol. 1’에서 노래한 자아와 영성에 대한 탐구는 이후 그녀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주제의 모티프가 되었다.
이처럼 큰 잠재력을 지닌 도이치의 커리어는 2022년에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2021년 EP 수록 곡인 ‘Yucky Blucky Fruitcake’가 틱톡에서 바이럴되며 음반사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톱 도그 엔터테인먼트(Top Dawg Entertainment, 이하 ‘TDE’)가 손을 내민 것이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TDE는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시저(SZA), 스쿨보이 큐(Schoolboy Q) 등을 배출한 유력 레이블이다. TDE와의 결합은 캐피톨 레코즈(Capitol Records)와의 메이저 계약까지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신예 힙합 스타들이 거쳐가는 관문으로 유명한 ‘2022 XXL 프레시맨(Freshman)’에도 선정됐다. 힙합 매거진 ‘XXL(더블엑스엘)’이 매년 10명의 떠오르는 스타를 엄선하여 소개하는 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신예들은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다. ‘XXL 프레시맨’으로 소개되었을 때 도이치는 랩을 시작했던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자신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정말 형편없었어. 영원히 찌질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나 자신이 되기 두려워서 형편없이 굴었어.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쓰다 보니 멍청하고 유치하고 구린 행동을 한 거야.”** 그러나 그녀는 음악에 매료되고 직접 만들어내는 과정을 거치며 비로소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었다.
도이치의 음악은 마치 캔버스 위에 물감을 흩뿌리듯 대담하고 자유롭다. 목소리를 섬세한 붓질처럼 사용하며 곡마다 독창적인 색채를 더한다. 음악 속에서는 전통적인 힙합 비트, 장르 퓨전, 탈힙합적 프로덕션이 공존하며 신비롭고 몰입감 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더불어 도이치는 선율과 운율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감정의 파도를 타고 흐른다. 그 끝에서 강렬한 에너지와 유머 감각 그리고 감정적인 깊이가 조화를 이룬 곡이 탄생한다. ‘Crazy’는 좋은 예다. 그녀의 내면 세계와 사회적 억압에 대한 해방감과 분노가 강렬한 비트와 래핑으로 표출된다. 볼티모어 클럽과 인더스트리얼 힙합 사운드가 뒤섞인 프로덕션 위에서 야성적으로 뱉어지는 래핑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벌스(Verse) 이후의 브리지 부분에서 이중 의미를 사용하여 언어유희를 작렬하는 가운데 “Mexico”, “letcha know”, “decimal”로 라임을 맞춘 솜씨를 보라. 여기에 전위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뮤직비디오까지…. 의심할 여지없이 전방위적으로 탁월한 아티스트다.
** “I was lame as f**k. I knew I wasn’t gonna be lame forever, but I was lame because I was scared to be me. I would act dumb and really childish and lame because I was trying to be somebody e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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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IAL IS A RIVER’도 그녀의 번뜩이는 음악적 감각을 체감할 수 있는 대표 곡이다. ‘제67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베스트 랩 앨범’ 부문 후보에 오른 세 번째 믹스테이프 ‘ALLIGATOR BITES NEVER HEAL(2024)’에 수록됐다. 도이치는 이 곡에서 치료사의 분신과도 같은 잠재의식 속 목소리와 솔직한 대화를 나눈다. 바람 핀 전 남자친구에 대한 디스로 출발한 이야기가 아티스트로 성공한 지금을 과시하는 것에 이르는 동안 거침없는 발언과 그동안 느껴온 불안감이 혼재된다. 곡을 접한 국외의 일부 여성 팬들은 ‘DENIAL IS A RIVER’가 흑인 여성들이 매일 겪는 불안을 잘 이야기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1990년대 힙합 사운드에 영향받은 프로덕션을 비롯하여 에미넴(Eminem)과 켄드릭 라마를 떠올리게 하는 연극적인 구성의 래핑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BOOM BAP’도 빼놓을 수 없다. 도이치의 뛰어난 랩 실력을 가장 잘 체감할 수 있는 곡 중 하나다. 제목인 ‘붐뱁’은 1990년대 이스트코스트 힙합의 상징과도 같은 스타일이다. 그녀가 중요한 자양분 중 하나로 삼은 당대 힙합에 대한 존중이 엿보이는 제목이지만, 프로덕션적으론 이를 살짝 비틀었다. 오히려 드럼을 배제한 채 서정적인 피아노 루프가 주도하는 드럼리스(Drumless) 힙합으로 문을 연다. 그리고 중반부를 지나며 심장박동 같은 리듬이 가세한 비트로 전환된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독특한 사운드를 창출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도이치의 래핑은 속도와 강약을 능숙하게 조절하며 전개된다. 곡이 끝날 때까지 단 한순간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도이치의 음악 세계를 좀 더 제대로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점이 또 하나 있다. 그녀의 성 지향성이다. 도이치는 현재 양성애자다. 성소수자(LGBTQIA+) 전문지인 ‘게이 타임스(GAY TIMES)’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도이치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자각적이었으며 항상 자신의 성 지향성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에게선 자부심이 느껴지지만, 도이치는 인종차별과 동성애 혐오가 만연한 남부 출신의 흑인 여성으로서 정말 정말 힘들었음을 고백한 바 있다. 그녀가 속했던 종교와 환경에서는 성소수자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이치는 성소수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난 나 자신이 될 수 있어, 이게 정상이야, 모든 게 괜찮아.’라며 끊임없이 마인드 컨트롤을 했고, 결국 지금의 위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실제로 도이치의 팬 중 상당수가 성소수자다. 이와 관련해 도이치는 퀸 라티파, 마돈나, 레이디 가가 등 그녀의 퀴어 아이콘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는 성소수자 팬들에 대해 “우리(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안목은 훌륭하다.”는 자부심을 이야기한 바 있다. ***
***“True, raw, talent. And, I’m gonna be honest, we just have great taste! I think that’s why a lot of my fans are gay, because we have great taste and we get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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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도이치의 위상은 여러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흑인이 주체인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총괄하는 시상식인 2023년 BET 어워드에선 ‘최고의 신인’ 부문, BET 힙합 어워드에선 ‘최고의 획기적인 힙합 아티스트’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그해 빌보드 우먼 인 뮤직 행사에선 ‘떠오르는 스타’ 부문을 수상했다. 오는 2월에 열리는 2025 그래미 어워드에는 ‘최고의 신인 아티스트’****, ‘최고의 랩 퍼포먼스(‘Nissan Altima’)’, ‘최고의 랩 앨범(‘Alligator Bites Never Heal’)’ 등 세 개 부문 후보에 올라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2월에 공개된 NPR 뮤직의 ‘타이니 데스크 공연(Tiny Desk Concert)’ 영상은 2주 만에 400만 조회 수를 돌파하더니 700만 뷰를 넘어섰으며, NPR이 선정한 ‘2024 최고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 톱 10’에도 선정되었다.
도이치는 단순히 음악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강력한 창작자다. 그녀의 곡 속에는 세상을 향한 질문과 자아를 향한 탐구가 잘 어우러져 있다. 이러한 요소 덕분에 누군가에겐 평소 간과한 것을 생각해보게 하고, 누군가에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이치는 새로운 프로젝트와 음악으로 팬들과 소통하며 세계 무대에서의 입지를 더욱 굳히는 중이다. 이제 우리에겐 ‘NISSAN ALTIMA’에서 그녀가 선언한 “새로운 힙합 마돈나”를 기꺼이 받아들일 일만 남았다.
**** Best Breakthrough Hip Hop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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