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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인
사진 출처Netflix Youtube

* ‘블랙 미러’ 시즌 7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초월하는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2011년 방영된 이래 꾸준하게 디스토피아적 근미래를 그려온 옴니버스 SF 드라마 ‘블랙 미러’가 던지는 오래된 질문이다. 지난 4월 공개된 ‘블랙 미러’의 일곱 번째 시즌은 특유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기술과 인간 사이에 놓인 오랜 난제들을 보여준다. 시즌 7의 6화 ‘USS 칼리스터: 인피니티 속으로’에는 디지털 클론이 등장한다. 이들은 게임 서버에 존재하는 소스 코드이지만, 실제 인간 DNA에 기반하고 있어 현실에 있는 인물의 기억과 감정, 판단력을 지닌다. 이들에게는 유한한 존재의 두려움을 느끼며 자유를 찾고자 하는 의지도 있다. 3화 ‘레버리 호텔’의 클라라는 작중 1940년대 영화에 출연한 배우의 정보를 토대로 생성된 가상의 존재다. 그는 자신이 받아들인 정보를 토대로 상대역과 사랑에 빠지고 프로그래밍 되지 않은 대사를 즉흥적으로 건넨다.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 신선한 활기가 있어요.” 물리적 특성 외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이 존재들을 우리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블랙 미러’는 그간의 SF 장르들처럼 인간과 기술 발전 사이의 오랜 질문들을 시각화한다. 예컨대 1990년대 존재했을 법한 가상의 게임을 다루는 4화 ‘장난감’은 3:4의 화면비와 레트로한 색감으로 당시의 정서를 구현하는 동시에 게임을 둘러싼 여러 논제를 소환한다. ‘장난감’의 주인공 카메론은 게임 잡지사의 리뷰어로 일하던 중 가상의 생명체 ‘스롱’을 키우는 ‘스롱렛들(Thronglets)’이라는 게임을 우연히 얻게 된다. 노란색의 작고 귀여운 캐릭터 스롱은 마치 아기처럼 시간에 따라 먹이를 주거나 씻겨주고 놀아줘야 하는 존재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양육하다 보면 스롱은 자가 복제를 거듭하며 점점 개체수를 늘린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만의 언어 체계를 형성하고, 유저 카메론과의 교류를 통해 사고를 확장해 나간다. 단순한 유대감 형성 수준이 아니라 구체적인 장비 개선을 요구할 정도로 발전한 스롱들의 사고 체계는, 어느 순간 인간을 초월하기 시작한다. 이 에피소드의 모든 장면은 게임과 기술을 둘러싼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우화에 가깝다. 극중 카메론은 게임 속 존재에게 극도로 몰두해 일상이 붕괴될 수준으로 자신의 물질적, 비물질적 에너지를 모조리 쏟아붓는다. 그와 대조적으로 스롱이 가상의 존재라는 이유로 캐릭터를 폭력적으로 괴롭히거나 그들과 형성하는 유대감을 하찮게 여기는 카메론의 친구 럼프 같은 인물도 있다. 유저가 모든 걸 쏟도록 제작된 게임은 과연 윤리적인가? 반대로 비물질적 존재와의 긴밀한 유대감은 전적으로 무가치한가?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리기도 전에, ‘장난감’은 카메론과의 대화를 통해 발전하는 ‘스롱렛들’의 모습을 AI 챗봇과 오버랩시키며 최근의 이슈까지 끌어들인다. 인간은 기술에게 데이터를 제공하고, 기술은 이를 토대로 더 합리적인 기술을 제안한다. 이제 누가 누구의 ‘장난감’일까?

‘블랙 미러’는 앞선 질문들에 대해 쉽사리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현실을 끌어들이고 더 날선 질문을 던진다. ‘USS 칼리스터: 인피니티 속으로’에서 천재 게임 개발자 로버트는 직장 동료들의 DNA를 불법으로 채취해 게임 속에서 재현한다. 그가 만들어낸 클론들은 자의식이 존재하며, 현실의 기억을 지닌 의식 체계이기 때문에 로버트의 행위는 사실상 사람을 가상공간에 감금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그는 게임의 주인공인 자신을 위해 이 클론들이 연기하도록 강제하거나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해당 에피소드의 디지털 클론은 CG가 아닌 실제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시청자는 외양만으로 클론과 인간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이 기묘한 체험은 점점 정교해지는 그래픽과 안일한 윤리의식이 결합되었을 때 발생하는 게임 산업의 그림자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로버트가 자행한 일련의 범죄는, 가상 설정을 앞세워 주변인들을 음침하게 대상화하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노골적인 비유이기도 하다. ‘블랙 미러’는 미래라는 소재를 가져오지만, 이야기의 핵심에는 현실을 놓는다. 이는 공상 과학물이라고 하기엔 블랙 코미디 같고, 패러디라기엔 너무 사실적인 묘사를 담은 사회 고발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블랙 미러’의 복합적인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그 정점에는 첫 번째 에피소드 ‘보통 사람들’이 있다. “흥미진진한 새 요금제로 업그레이드해요.” 이 말이 사람을 향하게 된다면? 미국에 사는 어맨다와 마이크 부부는 각자 교사와 건설 현장 근로자로 일하며, 소소하지만 만족스러운 일상을 보내던 ‘보통 사람들’이다. 어느 날 어맨다가 예기치 못한 불치병을 마주하자, 마이크는 어맨다를 치료하기 위한 혁신적인 의료 기술 ‘리버마인드(Rivermind)’를 접한다. ‘리버마인드’를 통해 어맨다는 일상을 되찾지만 새로운 삶의 대가는 조금 비싸다. ‘리버마인드’가 ‘구독제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가입 당시에는 조금 벅차지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리버마인드’는 점점 서비스에 등급을 나누고, ‘보통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구독료를 제시한다. ‘스탠더드 요금제’에 계속 머문다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 일을 할 수 없고, 그러면 기존의 구독료조차 감당할 수 없어진다. 기술은 두 부부에게 일상을 다시금 선물했지만, 그사이에 끼어든 자본의 논리는 다시 일상을 좀먹는다. 이는 자본을 지닌 소수가 기술을 독점할 때, 특히나 그것이 생명과 직결될 때 어떻게 사람들을 조금씩 주변부로 밀어내거나 사라지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현실의 메타포다. ‘블랙 미러’는 ‘구독’, ‘등급’, 요금제’, ‘업그레이드’와 같은 단어를 인간과 결합시키면서, 자본과 기술 사이에 놓인 윤리적 위험성을 직관적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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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에피소드에서는 매번 편리하고 상상력 넘치는 기술이 등장한다. 기억이나 사진을 기반으로 가상의 세계를 구현한다거나, 양자역학을 통해 현실을 조작한다는 기발한 설정은 그 자체가 스포일러라 할 정도로 시리즈의 재미를 구축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블랙 미러’는 놀라울 정도로 기술이나 세계관을 납득시키거나 설명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대다수 SF 장르가 전통적 의미의 히어로나 구원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반면, ‘블랙 미러’에는 ‘매트릭스’의 네오마저 없다. 대신 소시민적 인물과 일상을 전면으로 내세운다. 2화 ‘베트 누아르’는 양자역학 기술의 악용으로 일상을 조작 당하는 마리아의 삶을 그린다. 그러나 그 기술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는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대신 ‘베트 누아르’는 그 과정에서 마리아가 느끼는 위화감을 최대한 상세하게 기술하는 데에 집중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지시한 업무 내용이 다르게 전달되어 있고, 분명히 작성했다고 인지한 메일의 내용이 뒤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심지어 함께 사는 남자 친구의 모자에 써 있던 치킨 브랜드 이름을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다르게 기억하고, 이를 구글에 검색해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기억은 선명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사실은 모두 달라져 있다. ‘블랙 미러’는 이 미묘한 상황들을 통해 사회적 고립이 어떻게 한 사람을 말려버릴 수 있는지 체감하게 만든다. 이렇듯 ‘블랙 미러’ 연출의 핵심은 지독할 정도의 현실 묘사에 있다. ‘보통 사람들’에서는 ‘리버마인드’ 구독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숫자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그 숫자는 마이크의 기상 시간을 조금씩 앞당기면서 아침에 부부가 함께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없앤다. 또는 결혼기념일에 추억이 담긴 장소로 여행 가던 행복을 지우고, 퇴근 후에 즐길 수 있는 맥주의 양을 줄인다. 달력 위에 늘어나는 추가 근무 일정만큼 두 사람의 얼굴에는 조금씩 그늘이 진다. 거대 자본이 기술을 잠식하고 윤리적 경계선을 넘었을 때 일어나는 일은 어떤 혁명적 이벤트가 아니다. 그저 아주 조금씩 일상을 소실하는 것에 가깝다. 이처럼 정교한 생활상은 모든 가상의 상황과 사건을 1인칭 시점으로 끌어들여 피부로 와닿게 한다. ‘블랙 미러’가 던지는 질문들은 더 이상 거시적이지 않다. 나와 내 주변의 문제가 된다.

이 모든 질문을 따라간 끝에 시선이 모이는 건, 결국 기술이 아닌 사용자다. ‘USS 칼리스터: 인피니티 속으로’와 ‘베트 누아르’의 로버트와 베리티는 모두 조물주에 가까운 기술을 지녔지만, 이를 비틀린 자아의 욕망을 분출하기 위해서만 사용한다. ‘장난감’ 또한 인간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기술의 미래를 그린다. ‘보통 사람들’의 ‘리버마인드’ 뒤에 놓인 거대 자본 역시 인간의 욕망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취약성과 기술이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드러나는 건 인간의 악랄함이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으로 온갖 마법적 도구들을 만들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야만인이에요.” ‘장난감’ 속 카메론의 대사처럼 인류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윤리적 합의 속에 정체한다면, ‘블랙 미러’가 제시하는 갈등과 현실은 깊고 서늘할 뿐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무엇’을 만드는 것보다 ‘누가’,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부각시킨다. ‘블랙 미러’는 ‘스롱릿들’의 개발자 콜린을 계시자처럼 활용하며, 거의 경고에 가깝게 설파한다. “우리 인간을 개선할 수 없다면 우리가 소유한 도구들에 무슨 의미가 있어?”

물론 ‘블랙 미러’는 비관론적이거나 허무주의적 결론만 보여주지는 않는다. 거울의 양면처럼 인간과 기술 사이에 놓인 희망도 있다. 5화 ‘율로지’는 작중 추모를 위해 고인의 주변인들이 보유한 기억을 수집하는 가상의 기술을 다룬다. 노년이 되어 가는 주인공 필립은 젊은 시절 연인의 부고를 듣고 ‘율로지’라는 시스템을 접하며 과거의 기억을 복기하기 시작한다. 필립은 서로의 오해와 실수로 뒤얽힌 이별 때문에 헤어진 연인의 얼굴을 사진에서 하나하나 지워버린 탓에 전 연인의 얼굴조차 스스로 떠올릴 수 없다. 그러나 필립은 ‘율로지’를 통해 제3자의 입장에서 다시금 기억을 되짚으면서 과거의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혹은 외면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면서 아무리 애써도 떠올리지 못했던 연인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고, 진정으로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는 동시에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고통을 감내하며 직시하는 태도는 내면의 변화를 만든다. 이는 기술이 진정한 도움닫기로 인간에게 작용할 때 발생하는 새로운 가능성이다. ‘레버리 호텔’ 또한 기술을 토대로 나아가는 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레버리 호텔’의 주인공 브랜디 프라이데이는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흑인 여성 배우이지만, 언제나 예술 영화의 비극적 여성이나 상업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히로인 역할만 맡을 뿐이다. 그러던 와중 그는 과거의 영화와 배우에 대한 정보를 입력해서 AI로 구현하는 신기술 ‘리드림(ReDream)’을 통해 리메이크되는 1940년대 고전 영화의 주인공을 맡게 된다. 그는 과거 백인 남성이 맡았던 주연 캐릭터를 자신의 모습 그대로 연기하지만, AI로 생성된 인물들은 그를 성별과 인종을 통해 판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1940년대에 흑인 여성인 브랜디와 백인 여성(이자 AI인) 클라라가 사랑에 빠져도,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기술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제약을 뛰어넘게 하고, 그 끝에 “시대를 앞서는 이야기”를 만드는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

다시, 그 끝에 놓이는 건 사용자의 문제다. ‘레버리 호텔’이 남긴 어떤 여운에는 결국 브랜디와 클라라가 전하는 감정이 있다. ‘레버리 호텔’의 촬영 중 기술적 결함으로 진행이 중단되었을 때, 두 인물은 오로지 둘만의 세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된다. 둘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세상을 탐험하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거나 유머를 나눈다. 마치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듯한 감정의 깊이를 있는 그대로 옮긴 이 장면은 기술로 구현한 상상력으로 현실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다. 드뷔시의 ‘달빛’은 극중 브랜디가 맡은 배역과 클라라가 서로에게 첫눈에 반하게 만드는 곡이다. 때마침 브랜디와 클라라의 로맨스를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달빛’의 선율은 유독 영롱하면서도 조금은 거칠게 연주된다. 마치 이 두 사람의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관계를 청각적으로도 표현하듯이. ‘백일몽’이라는 ‘레버리(Reverie)’의 의미 그대로 모든 게 브랜디가 겪은 하룻밤의 꿈일지라도, 그 모든 게 그저 데이터에 불과할지라도, 그 안에서 만들어졌던 감정은 지워지지 않는다. 영화의 개연성과 구조가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져야 엔딩에 도달할 수 있는 ‘리드림’ 시스템 속에서, 뒤얽혀버린 사건으로 불가능했던 엔딩을 가능하게 만든 건 브랜디를 향한 클라라의 사랑이다. 이는 ‘블랙 미러’가 찾아낸 어떤 초월적 희망이다. ‘율로지’에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수 있게 만든 필립의 의지는 인간성에서 기인한다. 논리 구조를 뛰어넘은 브랜디와 클라라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불완전함은 기술을 통제하지 못하는 분명한 이유일 테다. 그러나 합리와 계산을 뛰어넘을 수 있는 불완전함의 가능성 또한 인간의 것이다. ‘블랙 미러’ 시즌 7은 결국 그 모든 복잡함을 품고 있는, 인간 본연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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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미러’ 시즌 1의 첫 에피소드 ‘공주와 돼지’는 이 시리즈의 파격적인 정체성을 각인시켰다. 납치된 영국의 공주를 구하려면 총리가 비인격적인 영상을 실시간으로 공개해야 한다고 협박하는 이 에피소드의 핵심은, 공주가 납치되거나 풀려나는 과정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누군가 무너지는 모습을 관음하고자 하는 군중심리부터 대의를 위해 소수의 인격은 묵살해도 된다 여기는 인간의 습성과 행태에 대한 예리한 조명은 전 세계 시청자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블랙 미러’ 시리즈의 파격성은 단순히 설정에서 기인하는 자극이 아니다. 모든 에피소드는 어떤 방향으로든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근본적인 면모를 극단으로 끌어내고 정교하게 표현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는 불쾌함과 아름다움, 충격과 감동이 공존한다. ‘블랙 미러’의 각본가 찰리 브루커(Charlie Brooker)는 시리즈 초창기에 진행한 인터뷰에서 ‘블랙 미러’라는 제목이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TV, 모니터 혹은 스마트폰의 검은 화면을 지칭한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14년이 흐른 지금, 이제 모두가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누군가의 몰락을 관음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 영향력은 모든 걸 왜곡하며 집어삼키는 블랙홀처럼 이미 예측하거나 통제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는 중이다. 그 검은 화면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투사할 것인지는 정말로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검은 화면 속 당신은 어떤 표정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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