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슬기 Hi Seulgi'
김리은: 누군가가 성실하게 쌓아올린 세계를 깊게 들여다보는 일은 이전보다 더욱 귀중해졌다. ‘추구미’의 유행은 결국 정보의 범람 속에서 나만의 고유한 취향을 갖는 일의 어려움을 반영하는 것일테니 말이다. 레드벨벳 슬기의 유튜브 채널 ‘하이슬기 Hi Seulgi’(이하 ‘하이슬기’)는 마치 그런 어려움에 답하듯 말 그대로 슬기에 대한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이 채널에서 슬기는 패션, 뷰티, 요리, 인터뷰, ASMR, 고민상담처럼 유튜브에서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콘텐츠들을 고루 시도한다. 그는 티셔츠 레이어드 팁, 신체적 특징을 고려한 옷 선택 기준을 설명하는 것처럼 패션에 대한 세밀한 감각을 보여주고, 발라드 가수 권진아가 출연한 ‘슬기네 사진관’에서도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 직업인으로서의 고충이나 내향적인 성격처럼 공통분모를 쉽게 찾아내며 편안한 대화를 이끌어낸다. 무계획으로 방문한 한남동에서는 평소 즐겨찾는 장소들을 기꺼이 소개하며 자신의 취향을 아낌없이 공유하기도 한다. 이처럼 ‘하이슬기’의 다양한 콘텐츠들을 일관되게 연결하는 힘은 인간 ‘강슬기’의 섬세한 취향과 더불어, 누구에게든 자신의 세계를 기꺼이 내어주고자 하는 진솔함에서 비롯된다.
“하고 싶은 걸 해 얘들아!” 슬기는 모교를 방문해 시험을 앞둔 후배들을 위한 응원을 남기며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도 그는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던 시간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12년 차 아이돌로서 활동하는 지금도 그런 노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활동기의 하루를 담은 브이로그에서 슬기는 하루에 세 시간만 잔 채 새벽부터 출근해 메이크업을 받고 사전 녹화, 미니 팬미팅, 챌린지 촬영, CD 사인, 노래 연습, 생방송 진행처럼 수많은 스케줄을 소화하는 하루를 보여줬다. 당시 슬기는 스스로에 대해 “원래 무대 전에는 말이 없어요. 원래 그래요. 그때가 저한테는 제일 예민한 시간이어가지고.”라며 온전히 스스로에게 집중해야 하는 순간이 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평소 아낌없이 자신의 취향과 감각을 나누어주는 것을 넘어, 이처럼 내밀한 순간을 카메라 앞에서 보여주는 것은 진정성의 영역일 것이다. 요컨대 ‘하이슬기’는 한 사람이 자신만의 견고한 세계를 구축하기까지 어떤 태도로 살아왔을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니 그가 활짝 열어젖힌 이 다정한 우주에서 누군가는 위로를 얻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갈등 앞에서 이성적으로 대처하기 어렵다는 20대에게 슬기가 건넸던 위로처럼 말이다. “분명히 많은 경험을 하면서 차차 좋아질 거예요.”

‘WWE: 언리얼’ (넷플릭스)
백설희(작가, 칼럼니스트): “이제 커튼을 걷으려고요.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세계를 공개하죠. 지금껏 감춰뒀던… 우리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펼쳐서 여러분께 보여드리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전직 프로레슬러이자 현 WWE의 CCO(최고 콘텐츠 책임자)인 폴 “트리플 H” 르벡의 이 말과 함께 ‘WWE: 언리얼’은 시작된다.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는 약 15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고 올해 은퇴를 천명한 프로레슬러 존 시나의 마지막 로열 럼블과 레슬매니아 41을 향한 여정을 따라간다. 동시에 2022년부터 CCO에 취임한 폴 르벡의 WWE가 왜 다시 크게 흥행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시절 프로레슬링을 사랑했던 이들에게 ‘WWE: 언리얼’은 선물과도 다름없다. 은퇴를 앞둔 존 시나는 물론이고 성숙한 모습으로 돌아온 CM 펑크와 다시 무대로 복귀한 “더 락” 드웨인 존슨, 그리고 깨알 같은 폴 헤이먼까지 우리에게 익숙했던 그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 들어 큰 기대를 받고 있는 여성 레슬러들의 활약에 대해서도 충분히 다루고 있다. 관객의 40%가 여성이며, WWE 브랜드 변화의 가장 큰 축을 여성이 담당하고 있다는 스테퍼니 맥마흔의 말은 여성 팬인 내게 반갑게 다가온다.
그간 팬들은 각본이 존재하는 프로레슬링은 엔터테인먼트 쇼일 뿐 스포츠가 아니라고 비하하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가짜라 해도, 선수들이 보여주는 퍼포먼스와 그에 따른 고통은 전부 진짜다. 경기 중 앞니가 부러진 게 아니냐는 폴 르벡의 질문에 티파니 스트래턴은 웃음을 터트리며 “걱정 마, 우리 다 앞니는 가짜잖아”라고 답한다. “우리 무대는 현실이거든요”라는 폴 르벡의 말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물론 그들 역시 “이건 스포츠가 아니에요(첼시 그린)”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의 일은 이야기를 전하는 겁니다(폴 르벡)”라고 할 뿐. 하지만 스포츠가 아니라는 프로레슬링 경기를 보는 관객들이 느끼는 희열, 감동, 짜릿함 등은 진짜 스포츠를 보고서 받는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생에서의 마지막 레슬매니아 41을 앞두고 기존의 ‘선’ 포지션(베이비 페이스)에서 ‘악’ 포지션(힐)으로 전환한 존 시나는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영웅 서사와는 결이 달라요. 위험에 빠진 세상을 구하고 끝나는 단순한 얘기가 아니죠. 여러 반전이 숨어 있기에 이 이야기가 근사한 겁니다.” 과연 20년 가까이 업계에서 구른 노장다운 통찰이다. 존 시나의 이 말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프로레슬링을 사랑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 곡 쓰기의 기술 (제프 트위디)
김복숭(작가): 밴드 윌코(Wilco)의 리드 싱어 제프 트위디가 ‘한 곡 쓰기’에 관한 책을 냈다. 이런 주제의 책이라면 코드나 멜로디 같은 음악 이론에 대한 조언으로 가득할 거라 예상할지도 모르지만, 이 책은 기술서가 아니다. 트위디가 ‘한 곡’을 써보라고 권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작곡을 넘어서는 도전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작은 것부터 시작함으로써 불안과 두려움에서 비롯된 무기력에서 벗어나고, 덜 압도된 상태로 창작 과정에 임할 수 있다고 한다.
스스로 놀랄 만큼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도 있고,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할 수도 있다. 어쨌든 창작이 어려운 일임은 분명하지만, 이 시도는 충분히 의미 있을 뿐 아니라 창작의 원동력이 되어 음악을 넘어선 예술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앞서 소개했던 책에서도 언급했듯, 실패를 받아들이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트위디는 자신의 거친 초고를 돌아보며 건설적인 자기 비판을 해보라고 권하면서도, 실용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중 몇몇은 꽤 단순하다. 아무 단어나 써보며 영감을 얻거나, 좋아하는 노래나 책, 다른 창작물에서 아이디어를 ‘훔쳐와 보는’ 방법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엄격한 시간 제한을 두고 써보거나, 푹 잔 뒤 새로운 머리로 다시 시작해보는 방법이 특히 유용했다. 결국, 내가 즐겨 소비하던 무언가를 내 손으로 만들어내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짜릿한 만족을 주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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