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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우(CINE21 기자)
사진 출처CJ ENM

4인 가족이 부둥켜안고 있다. 부부와 큰아들은 얼추 눈높이가 맞는다. 문제는 작은딸이다. 어린아이는 성인과 청소년 틈에서 고개를 들기 어렵다. 관객에게도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고 존재감이 희미한 것은 아니다. 손윗사람들 사이에 간신히 낀 아이는 그들의 가슴께에 머리를 집어넣고 공간을 확보한다. 엄마와 오빠의 명치를 건드려가며, 시야를 일부 차단당한 채 의식에 동참한다. ‘어쩔수가없다’ 오프닝 시퀀스의 마지막 숏이다. 기쁨으로 충만한 정상 가족은 하나의 덩어리로 엉겨 있다. 카메라는 이 구도에서 조금은 소외된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 장면의 목적이 거기에 있지 않으니까. 다만 영화를 두 번째로 관람하는 내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비로소 그 구겨진 형상이 대변하는 무언가를 감지했다. 그리하여 막내 리원(최소율)의 관점에서 다시 본 ‘어쩔수가없다’는 주인공 만수(이병헌)의 입장을 헤아려보려 애쓴 첫 시사 때와는 다른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일러둘 것은 이 작품이 원작으로 삼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가 딸에게 영화만큼의 비중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주인공의 가족 구성원 중에서도 딸 캐릭터를 매우 적극적으로 각색했다는 뜻이다. 소설 속 딸 벳지는 첫째 아이로, “집에서 60km쯤 떨어진 전문대학교”에 다닌다. 둘째인 아들 빌리와는 다르게 장성했으며, 이미 출가해 부모 손을 덜 타는 것이다. 한편, 아들은 영화에서처럼 소설에서도 친구와 공모한 범죄 혐의로 체포된다. 이 사건은 가장의 실직으로 위기에 빠진 가족에게 경종을 울리는 데다 부자간의 비밀스러운 연대를 형성하는데, 소동으로부터 멀리 있는 벳지는 아빠 눈에 “착하고, 정상적이고, 이런 변화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아이”로 비친다. 리원과는 나이도 성격도 구별되는 셈이다. 박찬욱 감독은 이 차이로써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

행복에 겨운 포옹 이후, 아빠 만수는 해고당한다. 엄마 미리(손예진)는 긴축에 돌입한다. 아들 시원(김우승)이 달고 사는 넷플릭스 구독을 해지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딸 리원이 두각을 드러내는 첼로 레슨을 줄여야 할지 모른다고 겁준다. 자신도 테니스와 댄스 강습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미리는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한다. 남편이 직장을 잃자, 아내가 직장을 찾는 아이러니 혹은 당연한 분업은 중산층 가장(이었던) 만수를 묘하게 긁는다. 치위생사로 취직한 미리 곁에 선 젊은 치과의사가 거슬린다는 게 표면적 구실이다. 미리는 홀로 아들을 키우다가 만수와 재혼해 딸을 낳았기에, 만수는 미리가 세 번째 결혼을 추진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잠정적 결론마저 내린 듯하다. 만수 사전에 무릇 ‘남편’이란 처자식을 먹여 살릴 기술 하나쯤은 보유한 남자여야 한다. 의사는 그 기준을 너끈히 충족한다.

한번 가속 페달을 밟은 파국적 사고는 쏜살같이 달려 나간다. 급기야 만수는 가정에서까지 버림받지는 않겠다며 살인을 계획한다. 그가 아는 방법이라고는 가장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25년간 제지업 종사 경력을 살려 재기하기를 꿈꾸는 그는 가상의 구인 광고를 내서 자신과 비등한 이력을 갖춘 남자들을 고른다. 배우인 아내를 둔 범모(이성민), 미술학도인 딸을 둔 시조(차승원), 가족과는 멀어졌지만 ‘자연인’의 자유를 누리는 선출(박희순)이 그들이다. 만수는 세 표적을 차례로 미행하다가 총을 겨눈다. 때로 그들에게 이입해 격발을 주저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만수는 여느 스릴러 속 사이코패스마냥 날뛰는 것도, 억울한 피해자로서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것도, 심지어 전쟁에 끌려가 총을 쥐게 된 군인과 같은 상황에 부닥친 것도 아니다. 재취업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수사를 입에 올리긴 하나 만수는 그냥 중독자다. ‘종잇밥’이라는 표현으로 응축된, 자기가 인정받을 수 있는 업계에서 번 돈으로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에 중독된 것이다. 즉, 만수는 금단현상을 달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다음 행선지도 꼭 종이 회사여야만 하냐는 아내의 회유에는 그래서 아무런 힘이 없다. 여기까지도 ‘어쩔수가없다’는 원작 ‘액스’의 얼개를 충실히 따른다.

그렇게 만수가 미리와의 파경을 상상하는 동안 남매는 반려견들과 이별한다. 식구를 줄여서라도 생활비를 보전하겠다는 엄마의 결정이다. 이는 소설과 무관한 설정이다. 시원, 리원의 이름을 딴 시투, 리투는 개털 알레르기로 콜록거리는 미리의 부모에게 맡겨진다. 두 리트리버를 제일 그리워하는 건 리원. 그들이 리원의 유이한 친구인 걸까. 리원은 주인이 떠난 강아지 집에 들어가 “시투, 리투, 시투, 리투” 울부짖는다. 시원의 교우 관계가 이야기에 다각도로 영향을 미치는 것과 달리 리원과 관련해서는 그를 가르치는 첼로 선생만이 딱 한 번 나오는데, 전개상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확실하다. 바로 리원에게 음악적 소질이 있음을 관객에게 확인시키는 것. 선생은 연주를 토막토막 들려주는 아이의 실력을 어떻게 믿느냐는 학부모에게 단언한다. 제자의 재능이 지나치다고. 이 학생은 이제 음대 교수에게 배워야 한다고. 자기 교습비를 남에게 넘길 작정으로 이런 조언을 드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뒤이은 질문이 화룡점정이다. “리원이를 독립된 개인으로 살게 하고 싶다고 그러셨죠?” 대답과 다름없는 침묵에서 관객은 영화가 원작을 비틀면서까지 창조한 사정을 눈치채고 만다. 강아지 아닌 사람과는 교감하기를 꺼리는, 교류해봤자 상대의 말을 기억했다가 따라 하기만 하는 아이가 유독 흥미를 붙인 게 악기였음을. 그게 놀이가 되었든 생업이 되었든 막내를 ‘독립된 개인’으로 성장시키리라는 희망이 부부에게 있었음을.

영화는 특정하지 않지만, 리원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진단받은 것으로 보인다. 감독도 개봉 당일 이뤄진 관객과의 대화 현장에서 그러한 인물 비화를 전했다고 한다. 리원이 자폐 스펙트럼 가운데에서도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아이라는 점은 그의 그림에서도 알 수 있다. 극 후반부, 리원이 틈틈이 칠하던 흰 바탕은 각양각색의 동그라미들로 채워지는데, 그것은 리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악보로 밝혀진다. 범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연주하지 못하는 것을 연주하는 아이의 천부적인 재능이 종이 위에 수놓아졌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부녀를 비교하는 방식이다. 만수와 리원은 두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우선 둘 다 깊이 애호하는 대상이 있다. 만수에게는 식물이, 리원에게는 첼로가 그렇다. 그러나 분재가 아날로그 인간인 만수의 고급 취미이자 무엇이든 자기 성미에 맞게 고치려는 습성을 지시하는 수단에 그친다면, 음악은 리원의 영혼이 쉴 곳이자 미래를 걸 만한 재주로 묘사된다. 또한 두 사람은 어디서 듣고 온 말을 되풀이하는 모습을 관객에게 들키는데, 만수는 경쟁자들에게 동화하는 과정에서 실수하듯 그러지만 리원은 어른들을 관조하는 태도로 무심하게 웅얼거린다. 그 대사가 종국에는 어떤 계시처럼도 읽히는데, 박찬욱 감독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첨언했다. 리원이 “마치 예언하는 어린 샤먼 같기도 한 초월적인 면모를 보였으면” 했다고.

더불어 감독은 전작 ‘헤어질 결심’이 여성성을 탐구한 시라는 전제를 깐 뒤 ‘어쩔수가없다’는 남성성을 탐구한 산문이라고 자평했다. 두 편 모두 챙겨본 관객이라면 끄덕일 만하지만 ‘어쩔수가없다’에도 분명 시적인 구석이 있다. 나는 극중 최연소 여성인 리원이 그 부분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집안의 비극을 어디까지 파악했는지는 미지수다. 첼리스트로서 진로를 개척할 수 있을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라스트 신으로 치닫기 위해 재생하는 건 리원의 첼로 연주다. 아이는 돌아온 강아지들만을 청중으로 앉혀 놓고 콘서트를 열지만, 감독은 미리, 시원, 그리고 관객에게까지 그 선율을 들려준다. 듣지 못하는 건 새 일터로 처음 출근한 아빠 만수뿐이다. ‘헤어질 결심’의 결말부, 해준(박해일)이 스스로 모래를 파고 들어간 서래(탕웨이)를 끝내 발견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만수와 해준은 너무 다르지만, 자신이 무얼 모르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닮았다. 카메라가 만수와 함께 AI 기술이 도입된 공장에 도착하고부터는 화면 너머로 엄청난 기계 소음이 울려 퍼진다. 이때 리원의 연주는 묻힐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불확실성, 그로 인해 생기는 가능성. 자기합리화에의 중독에서 벗어나야 받아들일 수 있는 피투성(被投性). 리원이라는 시어가 은유하는 가치는 이런 게 아닐까. 소설의 뿌리를 영화에 옮겨 심으면서 다듬은 줄기는 결국 어쩔 수가 없다는 변명을 보기 좋게 비웃는다. 제법 근사한 분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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