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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대중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출처선미 X

선미의 음악은 일종의 페르소나에 가까웠다. 오래 묵은 감정을 털어내듯 홀로 강렬히 춤을 추던 ‘가시나’나 바닥을 기며 기괴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꼬리’가 대표적이다. 하나의 연극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한 명의 캐릭터가 무대를 장악하며 날뛰었다. 비록 그가 음악 제작 전반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고 해도 음악 속에서 구현된 ‘선미’는 자연인 ‘선미’와는 철저히 구별되는 또 다른 인물이다. 그는 매 앨범 새로운 가면을 쓰고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에 섰다.

추측건대 선미에게 음악은 자신만의 유일한 해방구이자 분출구였을 것이다. 실생활에서는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지만, 머릿속에서는 즐겁게 자글대는 내밀한 생각과 감정들이 분명 존재했을 테다. 선미는 이러한 날것의 감정들을 엉겨 모아 매번 새로운 캐릭터로 빚어냈고, 이를 음악이라는 안전한 그릇에 힘껏 쏟아냈다. 그렇기에 그간 선미가 솔로로 발매한 음악들은 매끈하게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라기보다 그의 복잡한 내면에서 튀어나온 다채롭고 날카로운 파편들처럼 느껴진다.

선미의 시간
만으로 열네 살,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였다. 반 배정도 받지 않은 이른 시기에 그는 JYP 소속 최초의 걸그룹 원더걸스로 데뷔했다. 관계를 맺는 방법도,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도 희미하던 나이였지만 그에게는 나를 돌아볼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챌린지’라고 불러도 무방한 ‘Tell Me’의 성공과 연이은 ‘So Hot’, ‘Nobody’의 흥행까지 숨 돌릴 틈 없이 질주했다. 타인이 정교하게 설계한 기획 속에 자신을 온전히 맡겨야 했다. 자신의 색깔을 주도적으로 찾기보다는 프로듀서가 입혀주는 색과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를 덧입고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최우선이자 유일한 선택지이던 시기였다. 데뷔한 지 고작 2년도 되지 않았던 때, 그의 나이는 만으로 열여섯이었다.

그가 솔로로서 ‘선미’라는 하나의 이름만을 걸고 활동을 시작한 것은 미국에서 활동 중단을 선언한 지 3년 반만의 일이었다. ‘24시간이 모자라’, ‘보름달’ 등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솔로 가수라는 이름표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때까지의 선미는 창작자라기보다 프로듀서의 의도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탁월한 ‘퍼포머’에 가까웠다. 만들어진 기획 속에 자신의 능력을 한껏 녹여냈다.

창작자로서의 페르소나를 갖게 된 것은 원더걸스에 재합류하면서부터였다. 밴드 콘셉트에 맞춰 멤버 한 명씩 각자 악기를 배우게 되었고, 선미의 포지션은 베이스였다. 명확히 보이지 않는 음악적 영감을 구체화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얻은 그는, 이를 기점으로 직접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참여한 음악 또한 선미의 시간과 닮아 있었다. 본인이 직접 화자가 되어 직접적으로 대중에게 대화를 걸기보다는 기존 그룹이 가진 것에 새로운 원단을 덧대는 듯한 음악을 구현했다. 이전까지 시도해본 적 없는 레게 장르를 메인으로 삼았던 ‘Why So Lonely’가 그렇다. 원더걸스가 기존에 쌓아온 복고 정체성 위에 채도 높은 색들을 감각적으로 뒤섞어 독특한 색채를 더했다.

연습생 시절부터 오래 몸담은 소속사를 떠나, 새로운 곳에 둥지를 튼 선미는 그때부터 제작 역량을 날개 삼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가시나’, ‘주인공’, ‘사이렌’으로 이어지는 3부작이 큰 인기를 끌며 걸그룹 출신 솔로 아티스트가 아닌, 대한민국 음악계를 대표하는 솔로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했다. 오랜 시간 타인의 영감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살아온 경험은 아이러니하게도 창작자가 된 그에게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그는 곡을 쓸 때조차 자신을 있는 그대로 투영하기보다 노래가 요구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입히는 데 능했다.

즉, 선미에게 자작곡이란 일기장 같은 고백이 아니라 또 다른 자아를 연기하기 위한 무대 장치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그의 음악들이 하나의 매끈한 이야기가 아닌 날카로운 파편처럼 느껴졌던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 파편 하나하나는 진짜 선미가 숨을 불어넣어 만든 각기 다른 욕망을 가진 독립된 인격체들이었기 때문이다.

비로소, 선미의 서사
이번 ‘HEART MAID’ 앨범이 유독 색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데뷔 18년 만에 발매한 솔로 정규 앨범은 그가 파편화된 단편소설이 아닌 처음으로 직조해낸 장편 서사에 가깝다. 호흡이 긴 이야기가 깔리자 비로소 변화가 감지된다. 이전까지는 각기 다른 욕망을 가진 독립된 인격체처럼 흩어져 있던 음악 속 화자들이, 이제야 ‘선미’라는 하나의 구심점으로 모여들어 온전한 얼굴을 드러낸다.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장르들은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선미가 지나온 시간의 지층을 차례로 보여주는 거대한 회고록과도 같다. 앨범에 담긴 13곡은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묶인 것처럼 들린다. 첫 묶음은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원더걸스 그리고 솔로 아티스트 선미의 화려한 시간들이다. 강렬한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인트로 ‘MAID’와 신스 리프가 인상적인 ‘CYNICAL’, 1980년대 신스 팝 향수의 ‘Sweet nightmare’, 원더걸스의 ‘I Feel You’를 연상케 하는 ‘뚜뚜’까지. 선미는 자신이 걸어온 가장 빛나는 시간들을 농축해 앨범의 문을 연다.

이어지는 ‘미니스커트’와 ‘Tuberose’ 구간에서는 템포를 늦추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구축하며 퍼포머로서 그리고 대중이 보는 선미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그림을 그린다. 둔탁한 베이스 사운드로만 채워진 ‘Bass(ad)’를 기점으로 록 사운드가 잇따라 이어진다. ‘BLUE!’, “Balloon in Love’, ‘Happ af’까지의 구간은 과거 베이스를 메고 무대에 섰던 시간과 지금 선미의 모습을 교차시키며 소환한다. 그때의 도전이 일회성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앨범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친다.

마침내 모든 격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새벽산책’, ‘Bath’, ‘긴긴밤’은 화려한 조명 뒤에 가려져 있던 ‘인간 선미’의 지극히 개인적인 음악 취향을 드러낸다. 차분하고 내밀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이 마지막 구간을 통해 그는 대중이 바라보는 선미와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 사이 간극을 오가며 긴 서사의 막을 비로소 마무리한다.

결국 앨범의 마지막 트랙까지 듣고 나면, ‘HEART MAID’라는 제목은 비로소 선미라는 사람의 본질을 가리키는 열쇠가 된다. 그는 이번 앨범이 “사람들의 감정을 보살피는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날카로운 가시 혹은 꼬리를 세운 채 무대를 장악하던 퍼포머의 가면 뒤에는 사실 타인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들여다보고 살뜰히 챙기려는 다정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13곡에 걸쳐 펼쳐 놓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은 그가 살면서 마주했던 수만 가지 감정의 결을 하나하나 어루만진 흔적과도 같다. 누군가 만들어둔 틀에 맞춰 몸집을 키우던 어린아이는 이내 그 기획을 훌륭하게 구현해내는 퍼포머로 자랐고, 결국 자신의 무대에 필요한 가면을 직접 제작하는 아티스트가 됐다. 이제 그는 그 가면 뒤의 진심을 조금씩 드러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HEART MAID’는 선미가 18년 만에 정립한 자화상이자 기원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앨범에서 비로소 선미라는 아티스트가 지향하는 지점을 목격하게 된다. 가장 다정한 마음으로 ‘우리’의 세계를 축조해낸 이 기록을 선미의 진정한 ‘예술적 기원서’라 불러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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