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W
[NoW] 피카소의 영원한 열정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2021.06.04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피카소의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이 국내 최초로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에서 공개되었다. 프랑스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소장품들이 소개되는 회고전으로 회화, 조각, 도예 등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가리지 않는 피카소의 다양한 작품들은, 그동안 그의 입체주의 평면 회화 작업에만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공해주며 신선한 발상과 영감이 느껴지는 시간으로 다가올 것이다.
피카소의 초기부터 노년의 작업까지를 아우르는 7개의 테마를 지나며 나타나는 작품들의 풍경은 한 명의 작가로부터 탄생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벅찰 정도로 다양하고 독특한 창조성을 보여준다. 주요 작품으로 홍보되었던 ‘한국에서의 학살’은 6관 ‘전쟁과 평화, “한국에서의 학살”’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해 있던 피카소가 의뢰를 받아 제작한 작품으로,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제작되어 1980년대까지는 국내 반입 금지 예술품 목록에 속해 있었다. 한국에 방문한 적 없던 그가 접한 정보들로 제작된 작품인 만큼, 당시의 시대상과 환경에 따른 목적성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화면에서 국가나 진영을 유추하기 어렵고, 군인들의 무기를 마주하고 있는 이들의 공포와 비애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점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고 평화를 바라는 피카소의 반전 작품으로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반전을 주제로 삼았던 피카소의 이전 작품 ‘게르니카’, ‘시체 구덩이’보다 강조되는 색의 사용은 시기에 따라 변모하는 예술적 시도에 대해 되새길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러한 도전은 젊은 시절 피카소의 초기 시대, 우울한 푸른 색조가 두드러지는 청색 시대, 보다 화려해지고 생기가 도는 적색 시대의 화풍을 거쳐 입체주의의 선구작으로 평가받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남겼다. 이미지를 고전적 인식들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평가받는 입체주의의 기념비적 작품이었지만, 모든 혁신엔 낯섦과 충격이 따를 수밖에 없기에 처음부터 모두가 찬사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피카소는 멈추지 않고 다양한 입체주의를 실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고전주의, 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방식의 작업을 시도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이러한 열정이 회화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조각, 도예, 시, 연극 등 경계를 가리지 않는 종합적 예술 활동이 평생 동안 이어진 그였기에, 지금의 우리들에게 화가들의 대명사와도 같은 피카소라는 이름이 남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피카소의 관심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데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평생 동안 나는 사랑만 했다. 사랑 없는 삶은 생각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듯이 피카소의 작업 세계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랑과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들이었다. 스캔들로 인해 비난받기도 하였지만, 피카소는 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는 자세로 작업에 임했기에,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은 자연스레 새로운 시도로 이어지게 됐을 것이다.
그 결과 피카소는 지금까지도 ‘20세기의 거장’으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작품들을 남겼다. 미술사를 돌이켜 볼 때 이전 시대와는 확실하게 차별성을 가지는 새로운 조형적 변화와 함께 표현의 자유에 끊임없이 도전한 피카소의 열정이 당시에는 얼마나 파격적이었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한 예술적 모험이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예술 향유의 자극을 줄 수 있는 까닭은 여전히 작품 속에 살아 있는 도전의 가치와 창조의 에너지이기에, 피카소는 20세기 미술의 영원한 거장이자 선구자로 기억될 것이다.
피카소의 초기부터 노년의 작업까지를 아우르는 7개의 테마를 지나며 나타나는 작품들의 풍경은 한 명의 작가로부터 탄생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벅찰 정도로 다양하고 독특한 창조성을 보여준다. 주요 작품으로 홍보되었던 ‘한국에서의 학살’은 6관 ‘전쟁과 평화, “한국에서의 학살”’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해 있던 피카소가 의뢰를 받아 제작한 작품으로,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제작되어 1980년대까지는 국내 반입 금지 예술품 목록에 속해 있었다. 한국에 방문한 적 없던 그가 접한 정보들로 제작된 작품인 만큼, 당시의 시대상과 환경에 따른 목적성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화면에서 국가나 진영을 유추하기 어렵고, 군인들의 무기를 마주하고 있는 이들의 공포와 비애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점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고 평화를 바라는 피카소의 반전 작품으로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반전을 주제로 삼았던 피카소의 이전 작품 ‘게르니카’, ‘시체 구덩이’보다 강조되는 색의 사용은 시기에 따라 변모하는 예술적 시도에 대해 되새길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러한 도전은 젊은 시절 피카소의 초기 시대, 우울한 푸른 색조가 두드러지는 청색 시대, 보다 화려해지고 생기가 도는 적색 시대의 화풍을 거쳐 입체주의의 선구작으로 평가받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남겼다. 이미지를 고전적 인식들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평가받는 입체주의의 기념비적 작품이었지만, 모든 혁신엔 낯섦과 충격이 따를 수밖에 없기에 처음부터 모두가 찬사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피카소는 멈추지 않고 다양한 입체주의를 실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고전주의, 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방식의 작업을 시도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이러한 열정이 회화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조각, 도예, 시, 연극 등 경계를 가리지 않는 종합적 예술 활동이 평생 동안 이어진 그였기에, 지금의 우리들에게 화가들의 대명사와도 같은 피카소라는 이름이 남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피카소의 관심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데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평생 동안 나는 사랑만 했다. 사랑 없는 삶은 생각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듯이 피카소의 작업 세계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랑과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들이었다. 스캔들로 인해 비난받기도 하였지만, 피카소는 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는 자세로 작업에 임했기에,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은 자연스레 새로운 시도로 이어지게 됐을 것이다.
그 결과 피카소는 지금까지도 ‘20세기의 거장’으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작품들을 남겼다. 미술사를 돌이켜 볼 때 이전 시대와는 확실하게 차별성을 가지는 새로운 조형적 변화와 함께 표현의 자유에 끊임없이 도전한 피카소의 열정이 당시에는 얼마나 파격적이었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한 예술적 모험이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예술 향유의 자극을 줄 수 있는 까닭은 여전히 작품 속에 살아 있는 도전의 가치와 창조의 에너지이기에, 피카소는 20세기 미술의 영원한 거장이자 선구자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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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hae artmuseum
TRIVIA
입체주의(큐비즘)
20세기 초 미술 운동으로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르네상스 이래의 회화 전통에서 해방된 혁명으로 평가되며, 1908년 마티스가 브라크의 작품을 평하면서 ‘입방체의 덩어리’라고 말한 데서 유래되었다. 화면의 대상을 기하학적 형태 질서로 다루며, 현실의 공간과 시각을 복수의 시점으로 표현한다. 시기에 따라 초기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구분된다.
입체주의(큐비즘)
20세기 초 미술 운동으로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르네상스 이래의 회화 전통에서 해방된 혁명으로 평가되며, 1908년 마티스가 브라크의 작품을 평하면서 ‘입방체의 덩어리’라고 말한 데서 유래되었다. 화면의 대상을 기하학적 형태 질서로 다루며, 현실의 공간과 시각을 복수의 시점으로 표현한다. 시기에 따라 초기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구분된다.
글. 이장로(미술평론가)
디자인. 전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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