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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덕(대중음악 평론가)
사진 출처JENNIE - 'ZEN' Official Video

K-팝 역사에서 2025년은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APT.’, KATSEYE는 그래미 어워드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르는 성과에 앞서, K-팝이 일부의 취향을 넘어 글로벌 대중문화의 일부임을 이미 증명했다. 이 과정에서 K-팝은 완성된 상태로 소비되는 상품이 아니라 새로운 창작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만큼 자본, 언어, 인종의 교차점은 다양해지고, 과거에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K-’의 의미는 복잡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그 안에서 ‘K-’의 존재를 의심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K-’를 찾아내는 이유다.

제니는 ‘멜론 뮤직 어워드(MMA)’ 무대로 나름의 답을 냈다. ‘Seoul City’로 시작한 공연의 도입부에서 제니는 15m 길이의 거대한 베일을 늘어뜨렸다. 하얀 베일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노래집 ‘청구영언(靑丘永言)’의 일부가 빼곡히 새겨졌다. 1728년, 서울의 유명했던 가객 김천택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전국의 노래를 수집해 엮었다. ‘청구영언’은 ‘조선의 노래’라는 뜻이다. 그는 사대부와 평민의 작품을 나란히 싣고, 작가가 아니라 곡조에 따라 작품을 분류했다. 노래는 읽는 것이 아니라 부르는 것이고, 신분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이 순간 오늘의 K-팝 아티스트, 대중 가수의 계보는 조선의 시인과 가객들에게 연결된다. ‘청구영언’의 첫 작품은 “오늘이 오늘이소서 / 매일이 오늘이소서”로 시작한다. 매일이 오늘처럼 좋은 날이길 축원하는 노래이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한 순간을 영원히 붙잡고 싶은 열망이 읽힌다. 덧없는 명성과 싸우는 현대 팝스타의 운명은 18세기의 노래와 공명한다. 의상을 만든 브랜드 르쥬가 “이 언어는 나를 가둔 적이 없고, 오히려 나를 더 멀리 데려갔다.”고 썼을 때, 의도한 바일 것이다. 그리고 베일에 쓰인 것과 유사한 서체의 ‘제니’라는 이름은 2,000개의 스팽글이 되어 ‘Like Jennie’ 무대에서 흩날렸다. “나는 이 문자로 나의 이름을 다시 쓰고 있다.”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을 정도의 무대다. 하지만 반대로 제니라서 할 수 있고 제니가 해서 의미가 있다. 블랙핑크, 글로벌 팝스타, 당대의 셀러브리티이자 스타일 아이콘, 그리고 성공적인 솔로 아티스트. 그래서 ‘MMA’ 무대는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이하 ‘코첼라’)’ 공연과 짝을 이룬다. ‘젠첼라(Jenchella)’가 증명한 확장성과 지배력, 세계에서 가장 큰 페스티벌 무대의 메아리는 다시 바다를 건너 한국을 울릴 정도로 거대했기 때문이다. ‘코첼라’ 무대는 팝스타가 패션을 선도하는 미학을 담는다. 화려한 모자와 크로커다일 엠보싱 재킷, 카우보이의 덧바지 챕스(chaps)를 연상시키는 부츠로 꾸민 웨스턴 글램 룩은 조르주 호베이카디두의 최신 컬렉션에서 왔다. 여기에 자유로운 소통과 교감을 가능하게 하는 이중 문화 배경은 자신감, 개인주의, 성적 매력이라는 서구 팝의 무대 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도록 한다. 그는 홈그라운드에서 경쟁 가능하다.

요컨대 제니의 글로벌 존재감은 한국 아티스트로서의 자기 인식과 단순히 병존하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 갈아 끼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몸으로 합쳐져 있다. 그는 글로벌 시장에서 이국적인 신기함으로 남거나, 반대로 한국에서 볼 때 어색하고 낯선 존재가 되는 함정을 피한다. 대신 그사이에서 새로운 무엇이 되었다. 제니는 그 의미를 이미 또렷한 시각 언어로 표명했다. 지난 한글날에 공개한 ‘젠 세리프’ 서체다. 이 서체는 ‘중세 블랙레터(Blackletter)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예시된다. 넓은 펜촉을 사용하는 캘리그래피 전통에서 유래한 블랙레터는 강한 획 대비와 무게감으로 고딕 양식의 권위를 상징한다. 여기에 완전히 다른 언어를 쓰기 위한 한글을 결합하되, 장식적 요소를 줄이고 부드러운 곡선을 도입해 현대적 서체를 완성했다. 이는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조차 한글의 미학적 잠재력을 감상할 기회다. 서양의 중세에서 출발해 한글을 만난 서체는 다시 세계로 나가, 인스타그램의 숏폼 편집 도구에서 삽입되었다. 해당 플랫폼에서 전 세계적으로 사용 가능한 최초의 한국어 서체다.

무대, 의상, 서체에 이르는 시각적 기획은 유명세만으로 지지될 수 없다. 솔로 데뷔 앨범 ‘Ruby’는 모든 맥락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음악적 실체다. ‘피치포크’ 리뷰가 언급한 바와 같이, 제니가 솔로 아티스트로서 뚜렷한 음악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Ruby’가 결정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듣기 좋은 음악’. ‘Ruby’에는 디플로, 엘 구인초, 마이크 윌 메이드 잇 등의 스타 프로듀서진과 두아 리파, 도치, 차일디시 감비노, 칼리 우치스 등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가 참여했다. 제니는 이들의 손을 빌릴 수 있는 스타이면서, 동시에 처음으로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위치가 되었다. ‘빌보드’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이제 혼자이고, 옳은 결정을 내려야 하며” 가끔은 “이런 압도적인 통제권을 원하지 않”을 정도였다.

앨범 제목 ‘Ruby’는 그의 또 다른 예명 제니 루비 제인(Jennie Ruby Jane)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난 1년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제니는 자신을 보석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표현형을 깎아내는 세공사가 되었다. (앨범 커버는 루비를 바라보는 제니일까?) 그 출발점은 좋은 앨범이다. 제니가 ‘내 꿈의 퍼즐 조각’이라고 불렀던 앨범 ‘Ruby’는 제니를 글로벌 팝스타로 만들었다. 그 지위가 확실할수록, 그의 이름을 처음 불러준 언어와 문자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앨범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니가 발휘한 주체성과 그 결과의 우수함은, 자신의 찬란한 문화적 뿌리를 돌아보는 시도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자신만의 서체가 필요할 법하다. 다시 한번,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일은, 사실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기억할 것이다. 2025년의 K-팝에는 제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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