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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우(‘씨네21’기자)
사진 출처그린나래미디어

상담사에게 요리를 자주 하라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손으로 재료를 씻고, 썰고, 볶으며 신체감각을 깨우라는 뜻이었다.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향과 맛까지 가늠하며 오감을 활용할 일이 적으니 권고 사항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잠시 갸웃했을 뿐이다. 상담사가 내 방어기제를 꼬집으며 요리를 권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감정을 직면할 줄 몰라 상황을 논리적으로 해석하려 드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거다. “생각을 멈추고, 기분을 느끼세요.” 불편한 구석 없는 메시지였음에도 마음 한쪽이 찌그러진 건 영화 잡지 기자라는 생업 탓이었다. 개인적인 자극에조차 둔감한데 영화 속 타인들이 겪는 온갖 심경을 어찌 알아차려 왔을까. 그간 스크린이 발산하는 은근한 정취들을 얼마나 놓쳐왔을까. 나는 분수에 안 맞는 직업을 고른 걸지도 모른다는 근심에 젖어들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요리는 열심히 했다. 방어기제를 보완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지만, 배달 앱 지출을 줄이는 효과는 있었다. 종종 애썼다. 두부의 물기, 시금치의 흙내, 날달걀의 점도 같은 걸 의식해보려고. 부추를 썰 때 칼에 스미는 초록, 당근을 만질 때 손에 남는 노랑, 닭고기를 삶을 때 물에 뜨는 흰 꽃도 눈에 담아뒀다. 레시피를 보지 않고도 뚝딱뚝딱 차릴 수 있는 메뉴가 늘어나고서야 깨달았다. 나는 내 감정을 회피하는 주제에 영화를 보는 게 아니었다. 내 감정을 회피하니까 영화라도 보는 거였다. 그거라도 보면서 인물의 감정에 내 것을 포개어보는 거였다. ‘나도 저랬어, 저러지는 않았어, 저것보다 더했어….’ 웅얼거리게 해준 게 영화였고, 연극이었고, 소설이었다. 스스로 대피소에 숨어들어 놓고 거기에 적합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니 웃음이 났다. 도피할 자격이라는 건 없다. 도피하고 싶은 기억과 그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런 인물들을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신작 ‘센티멘탈 밸류’에서도 만났다. 부녀인 그들이 나와 동류라는 걸 눈치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직업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직업을 소화하는 방식 때문이다. 아버지 구스타브(스칼렌 스카스가드)는 영화감독이다. 15년째 새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지만, 제법 규모가 큰 영화제에서 회고전을 개최할 만큼 명망 있다. 그의 큰딸 노라(레나테 레인스베)는 연극배우다. 무대 공포증에 몸서리치면서도 ‘햄릿’ 역을 선택하는 용기는 붙잡고 있다. 언뜻 동종 업계 종사자로서 영향을 주고받아 왔을 듯한 두 사람은 줄곧 거리를 두고 지내왔다. 긴 시간 가족을 떠나 있었던 구스타브는 이혼한 아내, 즉 노라의 어머니가 작고하고서야 두 딸 앞에 나타난다. 구스타브는 도리를 다하는 양 태연한 표정을 짓지만, 자매는 황망함과 싸우다 황당함마저 떠안은 꼴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니 아버지가 딸들의 세상으로 복귀한 셈이니까. 재회는 더한 요구로 이어진다. 구스타브가 노라에게 두툼한 시나리오를 툭 건넨다. “널 위해 쓴 거야. 너만이 연기할 수 있어.”

‘센티멘탈 밸류’는 이 느닷없는 캐스팅 콜에 맥락을 부여하는 장면들로 채워진다. 아버지는 무얼 찍고 싶은 걸까. 그게 왜 딸을 위한 걸까. 반성문이라도 적은 걸까.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종이 뭉치를 사이에 둔 구스타브와 노라의 대면 직후 그들이 각자의 일터를 오가는 모습을 이어 붙일 따름이다. 구스타브가 과거 둘째 딸 아그네스(잉가 입스도테르 릴레오스)를 출연시켜 자기 어머니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새로 작업하려는 영화에도 어머니의 죽음을 다루려 한다는 것, 결국 할리우드 유명 배우에게 넘긴 그 어머니 역을 큰딸 노라에게 맡기고 싶어 했다는 것이 차츰 드러난다. 카메라를 도구 삼아 집안 내력으로부터 왔을지 모를 자기 문제를 탐색해온 구스타브는 아그네스의 아들 생일 선물로 ‘피아니스트’(미카엘 하네케, 2001)와 ‘돌이킬 수 없는’(가스파 노에, 2002) DVD를 가져온다. 여성과 모성을 이해하게 해줄 거라면서. 손자가 할아버지의 선물을 언제쯤 감사히 여길지는 미지수지만, 관객으로서 그 할아버지가 어떤 엄마와 살아왔는지 정도는 추측해볼 수 있다. 그가 왜 노라에게서 엄마와 유사한 면을 발견했는지도.

노라에게도 연기가 간절한 까닭이 있다. 그는 동료에게 “인물을 구축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돼 그의 감정을 느끼다 보면, 제 감정도 안전하게 느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센티멘탈 밸류’의 오프닝 시퀀스를 장식한, 노라가 6학년 때 쓴 에세이가 그 예시다. 노라는 사물이 ‘되어보라는’ 과제를 받고 자신이 사는 집의 시점에서 문장을 잇는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흐르는 내레이션은 흔한 ‘공간의 의인화’ 같지만, 실은 노라가 집이 되었다고 상상하고서야 털어놓을 수 있는 가정사다. 부모의 싸움이 잦아지면서 소음을 견뎌야 했던 집, 아버지가 사라지고서는 침묵을 꺼리게 된 집…. 노라는 자기를 지우고 집이 되기를 택함으로써 솔직해졌다. 자기 자신이 되기는 싫은 거냐고 묻는 동료에게 노라는 힘 빠진 미소를 돌려준다. 그 조용한 대답은 노라에게 있는 은은한 회피 성향마저 대변한다. 그는 동침한 남자에게 “당신이 유부남인 게 딱 좋다.”고 한다. “내가 얼마나 엉망인지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 대사엔 복합적인 뉘앙스가 배어 있다. 노라는 이미 자신이 엉망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지만, 아내를 두고 바람 피우는 남자에 비하면 자기가 낫다고 여기는 걸까. 그렇다기보다 노라에게는 자신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타개해 나갈 기력이 없다. (그는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구스타브의 엄마가 그랬듯이.) 남자가 솔로였다면 잠자리 이상의 관계를 고민해야 한다. 당장은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에, 노라는 안도했을 테다. 남자가 이혼 소식을 알리자 당황한 것도 그래서일지도.

예술과 창작이라는 통로를 거치고서야 삶의 굴곡을 겨우 응시할 수 있는 인간들. 그런 자기 한계를 잘 알아서 기어이 직접 통로를 뚫겠다고 나선 인간들. 그러다 서로의 작품을 언급하지 않고는 상대에 관해 어떠한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게 된 인간들. 멀어진 채로 닮아간 구스타브와 노라 곁에 아그네스가 함께한다는 건 이 집안의 기적이다. 같이 영화를 찍네, 마네 이죽거리는 아빠와 언니를 다독이며 용케 식사 자리를 마련해서만은 아니다. 재현(再現)으로 소통하는 데 익숙한 아빠, 언니와 달리 역사학자인 아그네스는 사료(史料)를 다룬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저항군에 합류했다가 투옥당한 뒤 고문받은 할머니의 멍 자국을 기록보관소에서 사진으로 확인한다. 구스타브가 미처 살피지 못했을, 노라가 감히 예상치 못했을 자료를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아그네스의 시선을 빌려 관객에게 전한다.

그제야 검은 화면 위 세 부녀의 얼굴이 여러 번 교차한다. 이 노골적인 디졸브는 서로 다른 문법으로 사고하던 세 사람 사이의 날 선 경계를 흐린다. 역사는 예술에 고통을 전이하고, 예술은 역사의 고통을 승화한다. 현실과 재현이 떨어질 수 없듯 구스타브와 두 자매도 가까이 지내지 못할지언정 영영 헤어질 리 만무하다. 그들은 바랄 뿐이다. 내가 그의 말을, 그가 나의 말을 왜곡 없이 알아들을 수 있길. 그건 노르웨이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스웨덴어로 말 걸기를 주저하지 않는 구스타브 같은 아버지가 누릴 수 있는 행운이 아니라는 지적도 타당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겨 먹은 아버지니까 시나리오 따위를 써 오지 않았을까. 아그네스 덕분에 협업할 수 있게 된 구스타브와 노라는 서툴게, 그래도 새롭게 옹알이를 주고받을 거다. 감독과 배우로서, 아버지와 딸로서, 공통 언어의 꿈을 꾸는 존재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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