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dit
배동미(‘씨네21’ 기자)
사진 출처쇼박스

서울에 재동이란 동네가 있다. 종로구 안국역 부근 헌법재판소가 자리한 곳이다. 재동이란 이름은 불에 타고 남는 물질을 일컫는 순우리말 재에서 왔다. 한때 이 일대가 얼마나 피비린내로 가득했던지 주민들이 재를 들고나와 많이 뿌렸다고 하여 잿골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1453년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을 몰아내는 계유정난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신하가 숙청당했다. 그로 인해 경복궁과 광화문에서 1km 정도 떨어진 잿골까지 핏물이 흘러들었다. 지금은 누구나 거닐 수 있는 재동엔 어린 단종이 몸서리쳤을 공포가 숨겨져 있다.

2026년 첫 ‘천만영화’에 등극한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박지훈)이 느꼈을 그 공포감부터 재현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문받는 신하들의 비명이 들려오는 궁. 작고 야윈 어린 왕 단종(박지훈)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견디고 있다. 이윽고 조정 대신들을 잔혹하게 고문하던 한명회(유지태)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오고, 카메라는 태산 같은 한명회의 어깨 너머로 낮은 곳에 앉은 단종을 비추며 그가 작디작은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제 내 차례라 오신 겁니까. 이제 내가 저들처럼 비명을 질러야 할 차례냔 말입니다.” 단종은 한명회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겨우 묻는다. 질문 형태의 대사이지만, 배우의 떨리는 목소리와 어두운 눈빛으로 인해 질문이 아닌 비극을 맞은 자의 낙담이란 걸 우리는 금세 알차리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난다. 궁에서 쫓겨나는 그의 눈에 효수당한 신하들의 주검부터 들어온다. 잿골이란 이름을 탄생케 한 그 피비린내 나는 풍경이.

배우를 흔히 ‘눈빛으로 말하는 존재’라고들 한다. 이는 캐릭터의 상황을 말로 전하는 대사뿐 아니라 눈빛에도 감정을 머금고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넓게 해석해보자면, 배우는 자신의 몸으로 이야기와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비슷하게 ‘왕과 사는 남자’ 속 배우 박지훈은 흔들리는 눈빛, 축 처진 어깨, 힘없는 발걸음 등 비언어적 표현에 기대어 17세에 폐위된 왕을 스크린에 새긴다. 슬픔으로 말할 기운마저 다 소진해버린 듯 말과 울음을 삼킨다. 배우 박지훈은 단종이 광천골에 발을 디디고 난 이후부터 대사 아닌 신체로 감정과 서사를 전하는 데에 더욱 몰두한다. 단종은 극심한 죽음 충동에 휩싸여 끼니를 거르고, 악몽에 시달리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삶을 끝내려 한다. 이때 배우는 몸에 힘을 최대한으로 빼 산 듯 죽은 듯한 캐릭터를 주조해 나간다. 영화의 다른 시각적 장치들은 그 무기력함을 배가시키는데, 특히 영월에 도착한 초기 심리적으로 무너진 상태일 때 단종이 입은 새하얀 한복은 그를 죽은 자처럼, 일종의 유령처럼 보이게끔 한다.

단종의 무력한 모습을 바라보는 광천골 주민, 그리고 관객은 한 가지 질문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 소년은 과연 왕이 될 만한 인물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흥미롭게도 그 의문은 배우와 캐릭터가 긴밀히 연결되는 극영화의 특성상 배우를 향한 질문으로 뻗어나간다. ‘아이돌 출신으로 웹드라마 ‘연애혁명’, OTT 시리즈 ‘약한영웅’ 등 드라마에서 활약한 박지훈이란 배우가 극장 영화에서도 단단히 중심을 잡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만큼 ‘폐위된 어린 왕은 과연 지도자다운 인물이었나?’, ‘박지훈이란 젊은 배우는 장편영화 주인공의 무게를 잘 짊어질 수 있을까?’라는 두 가지 질문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밀착되어 있다. 이에 관해 바로 답하자면 “그렇다.”라고 말하고 싶다. 광천골 주민들이 호랑이에 놀라 “왕이다.”라며 뒷걸음질칠 때, 단종은 “네 이놈”이란 대사를 강하게 내뱉으며 호랑이를 활로 무찌르고, 주민들이 그의 리더십을 체감하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영화 속 세계, 즉 픽션의 측면에서 나약하고 어리기만 한 존재처럼 보였던 단종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에게 최후의 백성인 광천골 주민을 구하고, 현실 속 배우 박지훈은 힘없는 소년의 모습에서 군자의 모습으로까지 도약하며 배우로서 역량을 펼쳐낸다. 이때의 연기는 호랑이 CG의 어설픈 만듦새마저 가린다. 특히 이 장면은 단종이 빈 활을 쏘며 “나약하고 못나서 내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나 자신을 위해 쐈다.”라고 말하는 씬과 맞붙으며 그가 쏜 호랑이는 폭력으로 권력을 차지한 수양대군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일 수 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그래서인지 단종은 활로 호랑이를 쏜 다음 날부터 자신의 슬픔에서 빠져나와 기운을 차려 식사를 하고 광천골 사람들과 어울리며 성군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씬을 기점으로 배우 박지훈을 향한 관객의 평가도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아역 배우 시기를 제쳐두고, 성인 배우로서는 연기 활동 초기라 할 수 있는 카카오TV 오리지널 드라마 ‘연애혁명’(2020)의 촬영 현장에 취재를 간 적 있다. 당시 그는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애교 많은 고등학생 공주영 역을 맡아, 보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사랑스러운 몸짓을 펼쳐야 했다. 원작 웹툰 속 공주영 캐릭터가 워낙 애교가 많아서 현실에서 그를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해하며 촬영 현장을 찾았다. 선배 기자가 그를 인터뷰했고, 나는 다른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현장에서 본 그가 연기하는 모습은 웹툰 속 캐릭터와 산뜻하게 잘 맞아떨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아이돌로서 갈고 닦은 시간 덕분인지 그는 카메라가 아무리 가까이 오더라도 긴장하거나 쑥스러워하지 않고 사랑으로 벅차는 자기 감정을 표현했다. 앞머리를 길게 내렸으나 맑은 눈은 무대 조명 없이도 반짝 빛났다. 이후 완성된 ‘연애혁명’을 작은 모바일 화면으로 볼 때 그가 영리하게 연기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만 ‘윙크남’이란 별명에서 알 수 있듯 제스처로 단시간에 시선을 잡아끄는 능력을 연기로 풀어냈다는 인상 역시 있었다.

하지만 ‘약한영웅’ 시리즈에서 그는 다소간 달랐다. 이전엔 어디 서 있든 얼굴에 햇살이 비치는 듯했다면, 그가 연기한 연시은의 얼굴엔 짙은 그늘과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시은은 말도 몸짓도 최소화되었다. 시은은 학내 폭력적인 상황에 휘말려 있었고, 부모와 같은 어른 세대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캐릭터로, 팔엔 깁스, 얼굴엔 상처, 얼굴엔 표정이랄 게 없었다. 배우 박지훈은 ‘약한영웅’ 시리즈에 이르러 캐릭터가 처한 상황을 은근한 방식으로 그려내었다. 이는 손짓과 눈짓, 그리고 애교 어린 말투로 공주영과 같은 캐릭터를 표현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진전이었다. 우기거나 뽐내듯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이야기를 위해 마련된 미장센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캐릭터의 삶을 표현해내는 건 더욱 까다로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약한영웅’ 시리즈에서 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캐릭터에 파고드는 중심을 점차 갖추게 되었다.

극장에 앉아 배우가 연기 인생에서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낸 순간을 목도할 때가 있다. 그 배우 특유의 연기 톤을 예상하고 극장에 들어서지만,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지는 때를 가끔 경험한다. ‘왕과 사는 남자’에서 배우 박지훈의 연기가 그런 경우였다. ‘약한영웅’ 시리즈에서 닦은 중심을 바탕으로 배우 박지훈은 단종이란 캐릭터의 가장 낮은 곳과 가장 경사진 면 모두를 돋보이게 표현해냈다. 자연스럽게 영화 속 세계에 녹아들다가도 강도 높은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순간에도 끓어넘치지 않고 정확하게. ‘왕과 사는 남자’는 3월 23일 기준 관객 수 1,500만 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그만큼 이 영화는 여러 관객을 너르게 포용했다. 다양한 경험을 지닌, 다양한 연령의 관객에게 다가간 만큼 영화를 향한 평가는 여러 갈래로 갈라질 것이다. 하지만 배우 박지훈에 한한 모두 동일한 생각을 품지 않았을까. ‘왕과 사는 남자’로 배우 박지훈은 관객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고. 이제 그는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는 배우가 되었다고.

Copyright ⓒ Weverse Magazine.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