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사병 전설이 되다’ (TVING)
정다나: “총 대신 식칼, 탄띠 대신 앞치마!” 거친 총칼과 엄격한 규율만이 군대를 움직이는 전부일까.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취사병 전설이 되다’의 주무대인 대한민국 육군 조리실은 철저한 계급 구조가 지배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그 엄숙한 공간을 비웃듯, 총칼 대신 행정보급관(윤경호)이 준 ‘장미칼’을 쥐고 부대를 평정하는 이등병 강성재(박지훈)의 세계로 시청자들을 초대한다.
가슴에 ‘스마일 배지’를 달고 있는 강성재는 우울 증세와 게임 중독까지 겹쳐 선임들에게 핍박과 무시를 한 몸에 받는, 그야말로 ‘관심병사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청년이다. 하지만 그가 취사병이 되는 순간 극은 코미디 장르로 180도 전환된다. 강성재는 식재료의 이름과 원산지, 공장 소재지, 유통기한까지 낱낱이 보는 비현실적인 스킬들과 함께 3년 묵은 쌀의 냄새를 사과식초로 지워내고, 원산지 오표기나 정량 미달 같은 주방과 납품 업체의 허점을 짚어내며 ‘전설의 요리사가 되는 길’을 걷게 된다. 그가 만든 성게알 미역국이 너무 맛있어서 대대장(정웅인)이 쓰러지거나, 과거 ‘성재네 식당’을 운영하던 부친과의 추억을 바탕으로 명태순살조림의 비린내를 토마토 스파게티 소스로 잡아 국회의원(박명훈)의 입맛을 사로잡는 과정은 능력으로 시스템의 한계를 타파할 수 있다는 고전적인 판타지, 혹은 소년 만화의 성장 서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소 고전적인 이 판타지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것은 유머가 담긴 연출이다. 부대의 최고 권력자인 대대장과 중대장이 강성재가 구운 삼겹살을 먹고 난데없이 바닷가를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장면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낸다. 또한 강성재의 요리를 맛본 이동식 매점 주인 고태석(나태주)이 뜬금없이 펼쳐진 축구장 한복판에서 건반을 누르며 현란하게 춤을 추는 강성재의 광기에 밀려 처참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은 미식의 카타르시스를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시각화한다. 이렇게 황당한 연출이 주는 진정한 쾌감은 오직 맛있는 밥 한 끼로 견고한 계급을 비틀 수 있다는 판타지에 있다. 무서운 선임도, 까다로운 간부들도 이등병 강성재가 내어놓는 요리 앞에서는 무장해제된다. 모두가 아는 고전적인 판타지의 맛을 알면서도 다시금 먹고 싶게 하는 이 작품 앞에서, 우리는 그저 쉴 새 없이 터지는 순도 100%의 즐거움을 편안하게 음미하면 그만인 것이다.

썬워즈히어(sunwashere) - ‘Good Nothing’
김도헌(대중음악 평론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내리쬐는 햇볕 아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는 가끔 무력감을 느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어떤 순간에 사로잡힌 채 까닭 없이 우울해진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줄 알았는데 역계절성 계절성 정서장애(Reverse SAD)라는 개념이 실제로 있다고 한다.
‘태양은 거기에 있었다’. 썬워즈히어의 첫 정규 앨범 ‘Good Nothing’의 정서가 꼭 그렇다. 화창한 청춘의 소리를 들려주는 페퍼톤스의 세 번째 정규 앨범에 객원 보컬로 참여하며 이름을 알렸던 이선은 2019년 새 이름을 달고 빛 속의 응달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기타 한 대와 목소리로 담백하게 곡을 쓰고 홀로, 또는 전용현과 이이언(eAeon)이 평온한 멜로디를 여러 각도로 반사하고 굴절하며 여러 조각으로 갈라지는 무지갯빛 음악을 완성했다. 그렇게 노래하는 것은 반복되는 일상 속 찾게 되는 공간과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무심하게 되풀이되는 가운데 매일 돌아오는 마음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쉽게 놓쳐버리고 마는 것들을 다시 헤아려보는 무력함, 후회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미약한 다짐이 ‘아무것도 아니어도 좋다’는 앨범을 완성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 보면 그냥 그렇게 믿어버리면 돼”라는 ‘가끔 매일’의 무너지는 독백처럼.
‘okay, hate me’, 사뮈와 함께한 ‘반추(feat. 사뮈)’에서 깊이 침잠하는 썬워즈히어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너 아니면 어쩌면’에서 노래하는 극복의 서사, 기타와 목소리만 있었던 곡을 풍성한 밴드 편곡으로 아련하게 그린 ‘차마’의 새로운 해석이 단단하게 여름날의 슬픔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싱어송라이터의 모습을 담고 있다. 조원선, 이융진, 한희정, 그리고 썬워즈히어.
앤 드 마르켄 - ‘영원히 계속되다가 끝이 난다’
김복숭(작가): 앤 드 마르켄의 책 ‘영원히 계속되다가 끝이 난다’는 종말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짧지만 오싹하고도 기묘하게 다정한 소설이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서쪽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주인공은 죽었지만 완전히 죽지 않은, 일명 ‘언데드’ 여성이다. 한때 집이라고 불렀던 장소와 한때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에게서 서서히 멀어져 가는 그의 모습은, 사라져 가는 기억만큼이나 어렴풋하고 쓸쓸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름과 추억 그리고 그를 구성하던 신체의 일부들까지도, 하나둘 떨어져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딘가로 흩어진다.
일반적인 공포 소설이 독자를 놀라게 하는 장면과 즉각적인 충격으로 긴장을 조성한다면, 이 책은 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이야기는 소리를 낮춘 채, 기묘하게, 마치 이해할 수 있을 듯 말 듯한 그런 꿈처럼 조용히 흘러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섬뜩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표현이 이 책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전통적인 공포 소설의 문법에서 한 발짝 거리를 두며, 말 그대로 존재 그 자체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초반에는 특히) 혼란스럽고 초현실적이면서도, 때로는 노골적으로 혐오스럽다가도, 어느 순간 시처럼 아름답게 흘러가는 책. 작가 마르켄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어쩌면 진부할 수도 있는 ‘좀비’라는 소재를, 결코 채워지지 못할 그리움과 엄청난 상실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갈망을 상징하는 은유로 재해석해냈다. 초현실적이면서도 시적이고, 동시에 불쾌함마저 함께 끌어안은 그런 드문 독서 경험을 찾고 있다면, 바로 이 책이 그 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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