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지를 찢다

강명석: ENHYPEN은 데뷔 후 세 번의 질문을 받았다. 주어진 것인지 쟁취한 것인지(‘Given-Taken’), 도취된 것인지 혼란스러운 것인지(‘Drunk-Dazed’), 길들여질 것인지 내동댕이쳐질 것인지(‘Tamed-Dashed’). 그리고 지난 10일 발표한 리패키지 앨범 ‘DIMENSION : ANSWER’의 네 번째 질문은 ‘Blessed-Cursed’. 그들이 받은 것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28만-38만-81만. ENHYPEN이 데뷔 후 1년 동안 세 장의 앨범에서 기록한 첫 주 판매량이다. ‘DIMENSION : DILEMMA’의 첫 주 판매량 81만 장은 4세대 보이 그룹 중 최고고, 가온차트 2021년 11월 기준 앨범 출하량 118만 장으로 밀리언셀러도 기록했다. 이 크고 빠른 성공 앞에서 자격에 대한 물음은 부질없어 보인다. 대신 그 성공이 축복이기만 한 것인지 묻는다. 이 답은 ‘Blessed-Cursed’의 가사에는 없다. 인기가 주어진 것인지 쟁취한 것인지에 답하려면 ‘Given-Taken’ 활동으로 더 많은 인기를 얻어야 하듯, ENHYPEN이 받는 질문들은 팀의 현실을 반영해왔다. 질문을 담은 타이틀 곡들은 ENHYPEN이 답을 낼 수 있는 과정이다. 답을 낼 만큼의 결과를 보여주지 않으면 다음 질문은 오지 않는다.

 

‘DIMENSION : DILEMMA’의 급격한 성장만큼 ‘Blessed-Cursed’의 질문은 한층 어려워졌다. ‘밀리언셀러 루키’가 축복이려면 걸맞은 위상을 세워야 한다. ‘Given-Taken’은 마치 무용과 연극 중간쯤에 있는 독특한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Drunk-Dazed’는 엄청난 운동량과 멤버들의 동작을 정확히 맞추는 ‘칼군무’를, ‘Tamed-Dashed’는 지난해 연말 방송 무대에서 극대화한 것처럼 미식축구를 응용한 난이도 높은 동작들을 멤버들의 정확한 호흡으로 소화해야 했다. ‘Blessed-Cursed’는 종합편처럼 퍼포먼스에 필요한 많은 능력들을 요구한다. ENHYPEN 멤버들은 자신의 파트에서 비트를 쪼개며 몸을 크게 쓰는 힙합 스타일의 춤을 선보이고, 훅에서는 멤버 전원이 이런 동작을 맞춰야 한다. 복잡하게 이동하는 동선을 따라가며 유닛 형태로 춤도 춰야 한다. ‘Blessed-Cursed’의 편곡은 복고적인 하드록 기타 리프 밑에 느슨하게 반복되는 트랩 비트를 깔아놓았고, ENHYPEN은 보컬과 퍼포먼스 모두 힘차게 그러나 계속 힙합의 바운스를 타면서 몸의 힘과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성공하면 성적에 걸맞은 실력에 대한 인증은 물론, 터프하게 움직이면서도 리듬을 즐기는 퍼포머로서의 ‘아우라’를 가질 수 있다. 이제 그들은 성적뿐만 아니라 무대 위 개개인의 역량을 증명해야 답을 낼 수 있다. 밀리언셀러 팀에게, 또는 팬데믹 이후 월드 투어를 해야 할 팀에게 요구되는 자격이다.

 

ENHYPEN이 성공적인 답을 낼지는 알 수 없다. 답은 누군가의 채점이 아니라 시장의 실제 반응과 스스로의 만족감으로 결정된다. ‘Blessed-Cursed’에서 그들의 현재를 “날 가두는 경계선 네 룰 따윈 집어치워”라고 외치려면 무대 위에서 이 패기를 납득시킬 모습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결국 결판은 무대에 위의 실력과 매력에서 난다. 지금까지 ENHYPEN은 성공할수록 쏟아지는 의문들을 대놓고 질문의 형태로 들고 나와, 무대 활동을 중심으로 한 아이돌로서의 힘으로 뚫고 나왔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한 데뷔, 전 세계적으로 형성된 팬덤 등 ENHYPEN은 요즘 아이돌의 여러 특징들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고전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아이돌 그룹의 가장 기본적인 길을 따라 성장했다. 도전이 오면 받고, 이기면 더 어려운 문제에 도전한다. 몇 세대가 지나든, 아이돌 그룹은 그 맛에 보는 거다.

멋지게 성장하는 목소리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 메탈 기타, 먹먹한 베이스 드럼, 혼란한 성장기의 가사. 얼마든지 무겁게 넘쳐흐를 요소들이지만, ENHYPEN과 만나면 딱 듣기 좋은 균형으로 봉합된다. 어떤 장르도 과잉되이 만들지 않는 그들 특유의 천진한 목소리 때문 아닐까. 천진하다는 표현이 마치 순진함을 부정적으로 일컫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나쁜 버릇들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과한 기교가 없기에 오토튠을 비롯한 플러그인 효과에도 잘 녹아나는 목소리들은 아무리 거친 음악을 가져와도 구구절절한 과잉 감성으로 흐르지 않는다. 대부분이 앳된 가운데 종종 스타일리시한 느낌마저 준다. K-팝에는 좀처럼 없던 이런저런 장르적 실험을 하고 있는 팀이지만, 감정의 증폭에 중점을 둔 그 격렬한 사운드가 사람의 목소리와 충돌하지 않는 것이 항상 인상적이었다. 이런 기조를 유지하면서, 이들의 실력은 새 작업물이 나올 때마다 눈에 띄도록 일취월장해왔다.

 

리패키지 앨범 ‘DIMENSION : ANSWER’의 타이틀 곡 ‘Blessed-Cursed’는 시작부터 거친 일렉트릭 기타로 압도한다. 하드록이라도 나올 것처럼 기대감을 끌어올리나, 이내 비트는 트랩을 떨구며 에너지를 훅 떨어뜨린다. 상반되는 두 가지 사운드가 노래 제목에서 보여주는 ‘축복받았거나-저주받았거나’ 하는 대립항처럼 곡의 주도권을 두고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트랩 뮤직은 보통 보컬 트랙도 몽롱한 분위기를 추구하기 마련인데 (멈블랩이라든지), ENHYPEN이 풀어나가는 톱라인은 이모 트랩보다는 도입부의 록 기타에 어울릴 마이너 록 스타일 멜로디다. 그렇다고 완연한 록 음악처럼 거칠거나 찌르는 보컬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격정적인 높은 음역대를 불러내면서도 그 속에서 트랩의 나른함을 조화시킨다. 가사는 대형 기획사와 대규모 TV 오디션 출신 팀으로서의 부담감과 그를 박차고 나아가는 지금 ENHYPEN의 상황을 빗댄 듯하다. ‘가짜 축복’, ‘유산 같이 건네진 승리’, ‘훈장 같은 저주' 같은 단어의 조합이 비장미를 발한다. 이런 무거운 곡을 일곱 명 멤버들은 마땅히 짊어져야 할 무게라는 듯 가뜬히 불러낸다. 2020년 데뷔 때와 비교해 눈부시게 성장한 보컬 실력들이 돋보임은 물론이다. 

 

새로운 수록 곡 ‘Polaroid Love’은 전작 수록 곡 ‘Not For Sale’이나 ‘몰랐어’ 같은 10대의 시선으로 본 사랑 노래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단순한 리듬과 편안한 멜로디가 마찬가지로 편안한 ENHYPEN의 보컬들과 잘 어우러진다. 어둡고 화려하게 오르내렸던 앨범의 다이내믹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듯한 인상이다. 마지막 트랙 ‘Outro : Day 2’가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듯 서서히 밝아오는 분위기로 끝을 맺는다. 언제나처럼 영미권 영 어덜트 소설의 한 장면 같은 내레이션의 내용은 ENHYPEN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다음 챕터 앞에 완전히 준비되었음을 보여준다. 아이돌 그룹을 아무리 처음부터 세심하게 기획한다 한들, 수행해내는 당사자들의 성장은 인공적으로 만들래야 만들 수 없다. 지난 2년 동안 한층 자라난 멤버들의 기량이 보이고 들린다. 2022년의 ENHYPEN이 더욱 기대된다.

 

‘Day 2’를 향한 의지


윤해인 : ENHYPEN은 ‘DIMENSION : DILEMMA’의 타이틀 곡 ‘Tamed-Dashed’에서 ‘일단 뛰어’가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리패키지 앨범 ‘DIMENSION : ANSWER’의 타이틀 곡 ‘Blessed-Cursed’는 그 뜀박질 끝에 발견한 진실과 해답을 그린다. 그들이 속한 세상은 축제처럼 화려한 축복 같았으나,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룰에 움직이고 때로는 ‘가짜 축복’이었다. 첫 번째로 공개된 콘셉트 포토 ‘NO’는 마치 그 깨달음을 반영하듯 ‘My Way’, ‘No’, ‘Just Stop’ 같은 키워드가 등장하고, ENHYPEN은 참견하지 마(‘Don’t Butt In’)라며 더 이상 지금까지의 세계를 믿지 않겠다(‘I Don’t Buy It’)는 메시지를 전한다. 미니어처 세상 속의 사람들을 ENHYPEN이 손으로 직접 움직이는 콘셉트 포토처럼, 그들은 내 역사는 스스로 써 내려 가겠다(‘I walk like a lion, 내 역사를 난 Making’)고 선언한다. 두 번째 콘셉트 포토 ‘YET’ 속의 ENHYPEN은 ‘NO’ 콘셉트와는 대조적으로 넓고 푸르르게 펼쳐진 초원을 바라보고, 잠시 바람을 느끼며 들판을 거니는 모습으로 연출된다. 한결 분노가 사그라든 그들의 표정과 함께 이내 드넓은 곳으로 뛰어가는 ENHYPEN의 모습은, 그들의 의지대로 달려간 세상에 대한 꿈 또는 희망일지도 모른다. 

 

ENHYPEN은 데뷔의 순간부터 자신들이 마주한 현실과 아이돌의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혼란을 담아 왔다. 오디션 프로그램 ‘I-LAND’를 통해 데뷔한 상황에서의 고민은 주어짐과 쟁취함(‘Given-Taken’)으로, 그렇게 입성한 화려한 세계 속에서 느끼는 도취와 혼란스러움(‘Drunk-Dazed’) 그리고 새롭게 발견한 욕망과 충돌하는 선택의 딜레마(‘Tamed-Dashed’)는, 이내 발견한 축복이자 저주라는 자신들의 현실(‘Blessed-Cursed’)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여정 끝에 이제 ENHYPEN은 자신들이 가는 길의  중심에 자신의 의지를 놓는 확신을 찾는다. ‘DIMENSION : ANSWER’를 끝맺는 ‘Outro : Day 2’ 속의 내레이션에서는 그들의 ‘나다움’과 함께 새로운 날을 맞이할 ENHYPEN의 모습이 그려진다. ‘Outro : Day 2’의 화자는 앞으로 남아 있는 빈 페이지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도 모르겠고, 당장 내일조차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불확실하다고 말한다. 다만 그는 한 가지를 확신한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 스스로 남은 페이지들을 채워 나갈 것이라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역사는 사실은  지금부터 시작인 것일까? 

글. 강명석,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윤해인
디자인. 전유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