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지 파이터’ (Mnet)
이희원: 과거 ‘댄싱9’부터 ‘스트릿 우먼 파이터’, ‘스트릿 맨 파이터’ 시리즈 등 많은 댄스 경연 프로그램을 제작한 Mnet이 이번엔 순수 무용 서바이벌을 선보인다. 발레, 한국무용, 현대무용 3개의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는 남성 무용수들은 자신의 춤으로 계급 전쟁에 참여하며, 계급은 높은 순서대로 ‘퍼스트’, ‘세컨드’, ‘언더’로 나뉜다. 무용은 연습과 노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테크닉 외에도 날 때부터 타고난 키, 체형 등의 신체 조건이 큰 영향을 주는 분야다. 그러나 무용수들은 이 불공평함과 잔인함을 알고도 춤 추길 선택했고, “평발이야. 춤을 못 춰야 하는데 잘 춰.”라는 심사위원의 말처럼 누군가는 그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신체적인 한계를 뛰어넘기도 한다. 스스로 “존재 자체가 감점”이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몸에서 오는 한계는 몸으로 극복해야 한 게 무용수”라며 핑계 대지 않는다. 프로그램이 정해놓은 계급처럼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어떤 차이들을 극복하려는 열정. 출연자들은 대형의 맨 뒤에 서더라도 한 동작 한 동작 온 마음을 쏟고, 결국 그 마음은 심사위원들 그리고 스크린 너머 시청자에게 닿는다. ‘스테이지 파이터’는 무용수들의 춤 이야기임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돌파구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방송사가 정한 계급으로 경쟁을 펼치면서도 무대가 펼쳐지는 내내 미소 짓고, 무용수 대 무용수로서의 존중과 존경을 표현한다. 참가자들은 누군가 ‘퍼스트’를 차지하면 “진짜 잘하긴 했어.” 인정하고, 자신의 계급을 빼앗아 간 사람에게도 먼저 악수를 건넨다. 서로의 한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 돌파하면서, 무용을 통한 연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실패할 것을 알고 있어요’ - 브로콜리너마저
김도헌(대중음악 평론가): ‘보편적인 노래’를 졸업하고 속물들을 자처한 브로콜리 너마저가 5년 만에 내놓은 새 앨범 제목은 ‘우리는 모두 실패할 것을 알고 있어요’다. 밴드 붐이 왔고 록 음악의 전성기가 돌아왔다는 왁자지껄한 이야기, 소셜 미디어상의 폭발적인 ‘좋아요’ 수가 희망을 품게 하는 오늘날 분위기와 반대로 베테랑 인디 밴드의 태도는 초연하다. 앨범은 ‘윙’의 가사처럼 “약간의 승리와 그만큼의 패배를 반복하며 그 자리에 버티고”, “그저 그 자리에 버티기 위해 생을 반복하며 모든 것을” 던져야 했던 한국 인디 음악 생존자들의 차분한 증언과 치열한 생존기다. 이제는 그 시공간이 하나의 신화와 낭만으로 굳어져버린 듯한 홍대 앞 인디 음악, 그로부터 피어난 꿈과 합창, 그럼에도 바꿀 수 없었던 냉혹한 현실이 브로콜리너마저의 열두 곡에서 잔잔히 흐르고 있다. 이대 앞 빵, 이리카페, 아마츄어증폭기, 쌈사페… 어떤 것은 남았고, 어떤 것은 사라졌다. 사실 너무 많은 것들이 이제 우리 곁에 없다. “삶도 노래도 뭔가 이뤄내면 괜찮을 줄 알았죠.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시간을 이길 수 없죠(‘너무 애쓰고 싶지 않아요’)”, “완벽한 노래를 쓰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러려면 무엇도 남기지 않았어야 해요(‘되고 싶었어요’)”… 덕원, 잔디, 류지, 동혁의 브로콜리너마저는 패배한 자들을 위해 노래한다. 수많은 실패에 지쳐버린 이들, 그럼에도 이미 예고된 실패를 위해 묵묵히 달려나가는 모든 바보들을 위로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계속 지고 있다. 누군가와 연락이 뜸해지고, 오래된 공간은 이미 없어졌으며, 새로운 음악은 추억의 술안주에 그치고 만다. ‘우리는 모두 실패할 것을 알고 있어요’를 들으며 다시 한번,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고 조세희 작가의 작업 노트 구석에서 발견된 문구를 빌려온다. “우리는 당분간 우리는 모든 싸움에서 지기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방의 계절’ -연소민
김복숭(작가): 작가 연소민의 포근한 소설 ‘공방의 계절’은 정신없고 바쁜 일상 속 극심한 번아웃을 겪던 TV 작가 정민의 이야기를 그린다. 30세 청년 정민은 퇴사 후 잠시 휴식기를 갖고, 새롭게 주어진 1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고 있는 정민. 정민에게 그의 과거의 문제들은, 마치 정민의 작은 아파트에 가득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만큼이나 크게 느껴진다. 그러나 어느 운명적인 날, 그는 어느 향기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고, 찾고 있던 좋은 커피 그 이상을 발견한다. 정민이 발견한 것은 한 도예 공방. 소설이 전개되며 그 곳은 정민의 새로운 삶의 중심이 되어간다.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점토의 향기, 천천히 무언가를 빚어낼 때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정민에게 세상 모든 일을 조금 천천히 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고독했던 정민은 도예의 치유 경험을 여러 등장인물들과 나누며, 이는 또 정민의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이 된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 공동체와 함께 정민이 걷는 회복의 여정을 따라가는 데 있다.
이번 연소민의 소설은 플롯에 치우치기보다는 개인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유해한 직장 문화에 대한 해결책을 직접적으로 다루려 하거나 심리 치료를 옹호하려는 이야기도 아니다. 편안하게 읽기 좋은 다른 책들처럼, 마치 책 형태의 ‘동물의 숲’ 게임 같기도 하다. 앞선 봄에 추천했던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혹은 남은 한 해를 좀 더 ‘힐링’으로 마무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위로가 되는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길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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