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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지, 서성덕(대중음악 평론가), 김복숭(작가)
디자인MHTL
사진 출처넷플릭스 코리아 YouTube

‘미친맛집: 미식가 친구의 맛집’
오민지: ‘미식(美食)’은 ‘맛 미(味)’가 아닌 ‘아름다울 미(美)’ 자를 쓴다. ‘아름다울 미(美)’는 음식에 관한 단어에서는 ‘맛있다’라는 의미가 된다. ‘한일 맛 교환 프로젝트’라는 명목 아래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로 알려진 일본 미식가 마츠시게 유타카와 한국의 발라드 가수이자 ‘먹을텐데’ 채널의 205만 유튜버 한국 미식가 성시경이 서로 ‘미’식가 ‘친’구가 되어 ‘맛집’을 추천하는 프로그램, 넷플릭스 ‘미친맛집: 미식가 친구의 맛집(이하 ‘미친맛집’)’은 음식 문화 속 그 ‘아름다움’을 다룬다. 이들에게 ‘맛집’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파는 집이라는 공간적 의미를 넘어 각 식당의 위치와 음식의 역사 그리고 서로 다른 식문화를 배우고 소개할 수 있는 곳이다. 아시아계가 많이 거주하던 이케부쿠로의 중식당에서는 ‘양마마(사장)’가 산이 많아 면을 운반할 때도 ‘지게로 짊어지고’ 산을 오르기 때문에 ‘짊어진다(担)’는 의미가 담긴 고향 사천의 ‘탄탄면’과 ‘우라 메뉴(메뉴판에는 없지만 단골에게만 제공되는 비밀 메뉴)’인 산채백육과를 소개한다. 한편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야키니쿠 식당에서는 한국식 공깃밥을 먹으며 불판을 바꿔야 하는 상황에 “바꿔주세요.” 대신 “슬슬 불판을 바꾸는 게 좋을까요?”라고 묻는 마츠시게의 직설적이지 않는 일본식 대화법 혹은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한국인의 정이 담긴 ‘쌈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과 일본은 ‘이웃 나라’이지만 밥공기를 드는 방식도, 젓가락의 재질, 같은 재료에 대한 조리법도 다르다. 마츠시게와 성시경 역시 국적도, 16살 차이의 나이도, 술 취향도(성시경이 점보 사이즈 생맥주를 마실 때 마츠시게는 논알코올 맥주를 마신다.), 고기를 굽는 속도도, 여유로운 시간에 무엇을 생각하는지조차도 다르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와 사람이 ‘미식’이라는 교집합에서 만나 ‘미쳤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음식들을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다. 녹음과 노을을 감상하며 치즈케이크의 달콤함을 즐길 때도, 연기가 자욱한 방에서 각자의 속도로 야키니쿠를 구워 먹을 때도, ‘미식’은 계속된다.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되’고, ‘먹어도 먹어도 부족’하면 친구에게 추천 받아 또 다른 맛집을 찾아가면 된다. ‘미식’의 ‘미(美)’, 그 ‘아름답다’는 단어 속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는 뜻 그대로 ‘미친맛집’은 음식의 맛뿐 아니라 그들이 있는 공간의 분위기와 배경, 자연스러운 대화와 주변의 소음마저 만족스럽게 만든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화면 너머의 사람들마저 하나의 밥상으로 초대하는 아름답고 맛있는 미식(美食)의 공간이다.

‘I Love My Neo-Soul’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
서성덕(대중음악 평론가): 지난 3월 1일, 앤지 스톤(Angie Stone)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네오-소울 유행기의 스타 중 하나로 기억된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활동한 여성 아티스트, 대표적으로 에리카 바두, 로린 힐, 질 스캇 등과 비교하면, 데뷔가 20년은 빠르다. 그는 1970년대 말 최초의 여성 랩 그룹 중 하나인 시퀀스(The Sequence)의 멤버이자 초기 힙합의 개척자로 기록된다. 이후 몇 번의 팀 활동과 더불어 성공적인 작곡가이자 백업 보컬로 메리 J. 블라이즈, 레니 크라비츠 그리고 디’안젤로의 앨범에 참여했다. 하지만 솔로 경력을 시작한 것은 그 자신이 무대 뒤에서 조용히 기여했던 네오-소울의 상업적 가능성이 확실해진 이후다. 1999년 ‘Black Diamond’와 2001년 ‘Mahogany Soul’은 장르의 클래식으로 남았다.
네오-소울은 일련의 아티스트를 지칭하기 위한 마케팅 용어로 시작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말이 어떤 음악가와 노래를 뜻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주류 R&B의 프로듀서와 샘플링 위주의 접근을 벗어나 싱어송라이터 중심으로 다양한 흑인 음악 장르를 탐색하는 방식은 당시 인디 음악에 대한 시장 전반의 관심과 부합했다. 앤지 스톤이 힙합에서 네오-소울에 이른 여정은 흑인 음악이 외부에서 부여받은 장르의 구획이 아닌 커뮤니티가 스스로 구축하고 제안한 스타일에 대한 명명이라는 가치를 공유한다. 특히 네오-소울은 여성 아티스트가 서사의 대상으로 주변화되기를 거부하고 창작의 핵심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앤지 스톤이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 ‘내가 다른 아티스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나 스스로는 왜 안 되는가?’에 대해 직접 내놓은 대답이나 다름없다.
스포티파이의 ‘I Love My Neo-Soul’은 바로 이 장르를 기린다. 네오-소울은 몇 년의 짧은 기간 동안 폭발적 결과물을 쏟아냈다. 재생목록에 들어간 100여 곡이 거의 실패 없이 증명한다. 앤지 스톤은 아마 시대를 다소 앞서 있었을지도 모르고, 이미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의 명복을 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영원한 불확실성’ -디트마어 엘거
김복숭(작가): 1932년에 태어나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그는 나치 독일, 사회주의 동독 그리고 더 자유로운 서독으로 망명하며 성장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성장 배경과 사회 활동 참여는 그의 삶과 예술에 분명한 흔적을 남겼지만, 리히터 본인은 종종 이러한 연결을 부인해오곤 했다. 그러나 디트마어 엘거가 쓴 전기 ‘게르하르트 리히터: 영원한 불확실성’을 읽다보면, 그의 삶과 예술, 이 두 요소는 분명히 얽혀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학교 미술 시간에는 뛰어난 성적을 받지 못했지만, 리히터의 추상예술에 대한 열정은 독보적이었다. 1960년대 팝 문화 사진을 흐릿하게 그리는 독특한 기법 덕분에 어떤 면에서는 대 예술가 앤디 워홀에 비견되기도 한다. 리히터의 작품들은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전기 작가 엘거는 그가 선택한 주제 이면에 숨겨진 비극을 섬세하게 글로 풀어냈다. 책을 읽다 보면 수많은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후에도 리히터가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하며, 조각부터 스테인드글라스까지 다양한 예술 형식을 실험해왔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독일 예술계가 오랜 암흑기를 지나 리히터라는 빛을 통해 다시 길을 밝힐 수 있었음은 점차 선명해진다.

책의 저자 디트마어 엘거는 수십 년간 리히터와 함께 작업해왔다. 리히터의 방대한 작품 아카이브에 독보적인 접근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엘거는 리히터의 수수께끼 같은 성격과 난해한 예술적 메시지를 여러 인터뷰를 바탕으로 명확히 전달해냈다. 비록 책은 리히터의 개인적인 삶보다는 작품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결국 그 사이의 연결 고리를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리히터가 인정하는 바 그 이상으로, 분단된 조국에서 받은 깊고 짙은 영향력은 그의 작품에 여실히 드러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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