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dit
김리은, 배동미(‘씨네21’ 기자), 백설희(작가, 칼럼니스트)
사진 출처넷플릭스 X

‘당신이 죽였다’ (넷플릭스)
김리은: 넷플릭스 시리즈 ‘당신이 죽였다’는 사랑의 결실로 포장된 결혼 제도의 사각지대를 끝없이 탐색하는 이야기다. 행복한 결혼식 사진이 가득한 고급 아파트, 옷장 속 가득한 명품 목걸이들, 증권사 부지점장으로서 능력을 갖춘 남편.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르면 전업주부인 조희수(이유미)는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남편 노진표(장승조)는 항상 우아한 클래식 음악으로 희수의 비명을 묻으며 폭력을 아로새기고, 이를 무마하듯 선물과 꽃다발로 다시 사랑을 속삭인다. 한때 촉망받는 동화작가였던 희수의 일상은 진표의 감시 아래 놓인 채 빠르게 시들어간다. 그런 희수를 구원하는 것은 용기내어 찾아간 경찰서도, ‘가정 폭력을 경험하면 주변에 도움을 구하라.’는 유명한 여성학자인 시어머니 고정숙(김미숙)의 강연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남동생을 데리고 옷장에 숨어야 했던 친구 조은수(전소니)의 결심이었다. 그는 희수를 도움으로써 인생의 기나긴 숨바꼭질을 멈추고, 동시에 자신까지 구원하고자 한다. 은수가 배우는 주짓수가 약자의 힘으로 강자를 상대하는 방법을 훈련하는 스포츠이듯, 두 사람은 제도권 바깥의 행위인 살인을 통해 견고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벽에 도전하고자 한다. 그래서 ‘당신이 죽였다’라는 제목은 중의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진표를 죽인 것은 희수와 은수일까, 아니면 사적인 영역이라는 이유로 가정 폭력을 외면하는 사회일까?

모든 여성이 여성을 구원하지는 않는다. 정숙은 평소 자신의 여성학 강연에서 강조하던 내용과는 달리 희수가 당하는 폭력을 알면서도 아들에 대한 맹목적 사랑으로 이를 외면한다. 유망한 형사인 진표의 동생 노진영(이호정)은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두 사람의 살인을 파헤친다. 그러나 이는 여성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라기보다 견고한 가정 제도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장치에 가깝다. 희수가 당하는 가정 폭력을 눈치채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아파트 아래층 여성,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은수로 인해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그의 안위를 먼저 묻는 VIP 고객 김미경(서정연)의 존재는 여성 간의 연대가 존재한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그리고 은수와 희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기꺼이 돕는 진강상회 대표 진소백(이무생)의 존재는 절망적인 현실을 모사한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판타지적인 존재다. 원작과 달리 남성으로 설정된 그가 제도권 바깥의 힘을 동원하거나 뛰어난 신체적 능력으로 두 사람을 돕는 것은, 결국 주짓수로도 약자가 승리할 수 없는 현실에서는 더 강력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한 폭로로 시작해 점차 범죄 스릴러로 좁혀지는 ‘당신이 죽였다’의 결말에는 단죄와 성찰과 연대가 공존한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용인될 수 없다는 단죄, 그럼에도 개인이 아닌 사회가 진정한 가해자라는 성찰. 그리고 저마다의 상처를 안은 이들이 평화로운 일상을 꿈꾸며 나아가는 연대까지. 결국 ‘당신이 죽였다’는 비극인 동시에 희망의 서사이기도 하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앞으로는 이 명제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품은.

‘더 러닝 맨’
배동미(‘씨네21’ 기자): 미래에 사람들은 풍족히 살 수 있을까, 곤궁하게 살아갈까. 영화 ‘더 러닝 맨’은 경제 양극화가 심각해져 많은 이들이 극단적으로 빈곤해질 것이라고 상상하는 쪽이다. 양말도 직접 뜨개질해서 신어야 하고, 감기약조차 구하기 어려워질 정도로 가난한 이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이다. ‘더 러닝 맨’의 주인공 벤 리처즈(글렌 파월)는 작업장에 방사능이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다. 게다가 그는 기업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는 처지다. ‘더 러닝 맨’ 속 세계에서 가난은 생존 문제로 직결된다. 벤은 감기로 일주일째 고열에 시달리는 두 살배기 딸에게도 제대로 된 약을 먹이지 못한다. 의료 시스템이 무너진 탓인지 이곳의 약값은 너무나도 비싸고, 약 자체도 암시장에서 겨우 구할 수 있어서다.

‘더 러닝 맨’ 속 세계에서도 부자나 빈자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양쪽 모두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거액의 상금을 내거는 잔혹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즐긴다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과 동일한 ‘더 러닝 맨’은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프로그램이다. 큰 상금을 얻으려는 이들이 ‘러너’로 출연해 도망 다니고, ‘헌터’라고 불리는 총칼로 무장한 이들이 러너들을 뒤쫓는 포맷인데, 늘 헌터들이 승리하고 러너들은 목숨을 잃는 것으로 매 시즌이 끝난다. 그런데도 가난한 이들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려 애쓴다. 딸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 적당히 위험한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하려던 벤은 제작자 댄 킬리언(조 브롤린)의 꼬임에 넘어가 ‘더 러닝 맨’에 출연하기에 이른다.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신작 ‘더 러닝 맨’은 소설가 스티븐 킹이 1982년 출간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책이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87년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벤 리처즈로 분한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유려한 편집의 대가 에드거 라이트 감독답게 이번 신작은 분노로 가득 찬 벤의 시점과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악의적으로 편집한 벤의 모습, 댄을 비롯한 방송국 내부의 사정 등을 빠르고 짜임새 있게 엮는다. 소설이 상상한 디스토피아는 2025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마침 이번 영화도 2025년에 개봉한다. 소설과 영화가 그린 각박한 세상은 많이 과장됐지만, 2025년 현대사회와 일맥상통하는 지점들이 있다. 자극적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어느새 중독된 현대인들의 모습이나, 극심해져만 가는 경제 양극화 등 주요 테마들은 관객을 뜨끔하게 만든다.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전작들이 그러하듯 ‘더 러닝 맨’은 관객이 정신없이 이야기에 따라가게 만들지만, 관객에게 여러 생각할 지점을 남긴다.

스포티파이 재생목록: Perfume ZO/Z5 Anniversary “ネビュラロマンス” Episode TOKYO DOME
백설희(작가, 칼럼니스트): 지난 9월 21일, 일본의 3인조 가수 퍼퓸(Perfume)이 메이저 데뷔 20주년을 맞은 2025년을 끝으로 콜드 슬립(활동 중지)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아~쨩과 놋치, 카시유카로 구성된 퍼퓸은 캡슐(CAPSULE)의 나카타 야스타카가 프로듀싱하는 테크노팝 사운드, 그에 어울리는 절제되고 섬세한 안무, 미디어아트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근미래적 무대효과 등으로 일본 음악계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해왔다.

이 플레이리스트는 ‘Perfume ZO/Z5 Anniversary ‘ネビュラロマンス’ Episode TOKYO DOME’의 세트리스트다. 2020년 팬데믹으로 개최가 중지되었던 도쿄 돔 콘서트를 리벤지하는 무대이자 퍼퓸의 마지막 콘서트이기도 하다.

세트리스트는 각각 2024년과 2025년에 발매한 ‘네뷸러 로맨스(ネビュラロマンス)’ 앨범이 전편과 후편으로 나뉘었듯, 투어 이름이 ZO와 Z5로 나뉘었듯 전편과 후편으로 나뉜다. 초반부는 지난 9월 17일에 발매했던 ‘네뷸러 로맨스 후편(ネビュラロマンス 後篇)’ 수록 곡에 치중되어 있으나, 후반부는 퍼퓸의 대표 곡으로 채워져 있다. 퍼퓸의 곡 중에서 가장 코어한 ‘edge’나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정수 ‘FUSION’, 초기 근미래 3부작 중 하나인 ‘일렉트로 월드(エレクトロ·ワールド)’ 등 퍼퓸의 음악적 퍼포먼스를 잘 드러내는 곡들이 포진해 있다. 퍼퓸은 12월 31일에 있을 ‘제76회 NHK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戦)’에 17번째 출전을 확정하며 여성 그룹으로서는 최다 출장을 기록하게 되었다. 퍼퓸으로서 마침표를 찍는 활동이니만큼 이 세트리스트를 들으며 그들이 어떤 곡으로 ‘지금’에 작별을 고할지 유추해보자. 참고로 내년에는 퍼퓸의 데뷔 동기인 5인조 아이돌 그룹 아라시(嵐) 역시 해산을 앞두고 있다. 지금 우리는, J-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는 순간을 목도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Copyright ⓒ Weverse Magazine.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