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장고를 부탁해 since 2014’ (JTBC)
정다나(객원 에디터): “재료가 없으면 어떻게 요리하세요?”라는 배우 이민정의 질문에 대한민국 최고의 셰프들이 한목소리로 답한다. “어떻게든 해야죠.” ‘냉장고를 부탁해 since 2014’(이하 ‘냉장고를 부탁해’)의 원칙은 간단하다. 내로라하는 셰프들이 오로지 게스트의 냉장고 속 재료만으로 15분 안에 요리를 완성해낸다. 게스트마다 취향, 식습관 등 라이프스타일이 다르기에 어떤 냉장고가 등장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코미디언 김원훈과 이수지의 냉장고에는 고가 식재료와 채소 등 각종 재료가 풍부한 반면, 배우 유지태의 냉장고에는 빠른 식사를 위한 분말가루만 가득한 것처럼 각양각색이다. 제한적인 상황에서 셰프들은 인스턴트로 건강식을 만드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미션에 대응해야 한다. 불을 사용할 수 없는 미션에서 최현석 셰프는 커피포트로 반죽을 익혀 라자냐를 완성하고, 권성준 셰프는 가루만 가득한 유지태의 냉장고에서 김치와 크래커, 적상추를 갈아 만드는 페스토를 만들어낸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요리들이 셰프들의 손을 거치면 “어떻게든” 완성된다.
그러나 ‘냉장고를 부탁해’의 무게중심은 요리의 완성도 자체보다, 그 요리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있다. ‘냉장고를 부탁해’의 출연진들은 대부분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하 ‘흑백요리사’)에도 출연해 이름을 알렸다. ‘흑백요리사’에서 진지한 태도로 요리에 임하던 박은영 셰프는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는 김풍 작가를 도발하기 위해 메뉴 이름으로 붙인 “김풍 삼진아웃”을 외치며 야구 제스처를 취한다. 그리고 ‘흑백요리사’에서 탈락에 대한 불안감을 솔직하게 보여주던 윤남노 셰프는 박은영 셰프와 티격태격하거나, 건강식을 만들어야 하는 미션에서 버터와 튀김이 건강하다고 주장하는 모습으로 웃음을 주기도 한다. 대부분의 요리 예능 프로그램이 셰프들의 전문성과 요리의 완성도를 치밀하게 검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서사에 집중한다면, ‘냉장고를 부탁해’는 비현실적인 조건 속에서도 모두가 즐겁게 대결에 임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국 맛으로 남는다. 유지태는 박은영의 인스턴트 건강식 요리를 맛보고는 “위안받는 느낌이네요.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아.”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냉장고에서 셰프들의 진심 어린 요리 철학과 웃음, 위로가 한 상으로 차려진다. 쉽게 잊히지 않을 15분의 밥상이다.
*작품 특성상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묘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최후이자 최초의 아이돌’ - 쿠사노 겐겐
백설희(작가, 칼럼니스트): 미쳤다. ‘최후이자 최초의 아이돌’을 다 읽자마자 든 생각이다. 1975년 이후 42년 만에 신인 작가가 데뷔와 동시에 성운상을 수상한 기념비적인 소설이지만, “최종 심사 자리에 있는 건 뭔가 잘못된 것”이라든가 “전반부 3분의 1은 최악의 수준”이라는 코멘트까지 받았다니. 이런 격한 반응은 애니메이션 ‘러브 라이브!’의 야자와 니코×니시키노 마키의 팬픽을 개작했다는 작품의 내력을 알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자신의 장르를 “실존주의적 와이드스크린 백합 바로크 프롤레타리아트 아이돌 하드 SF”라고 명명한 쿠사노 겐겐은 하드 SF와 아이돌, 모바일 가챠 게임, 그리고 성우로 대표되는 일본 서브컬처를 버무려 파격적일 정도로 새로운 소설을 탄생시켰다. 내가 무언가를 이리 열렬하고도 과격하게 좋아했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세카이계란 무엇인가’의 작가 마에지마 사토시는 이 책을 “나쁜 오타쿠의 ‘설정 놀음’의 연장선”이라고 설명하지만, 절대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 대체 누가 자신이 좋아하는 두 캐릭터를 엮기 위해 이런 상상을 하고 또 그 상상을 바탕으로 이런 하드 SF물을 쓴단 말인가? 한국에서의 정식 출간을 오래 기다린 만큼 보람 있던 독서였다. 쿠사노 겐겐이 우리 앞에 보여줄 또 다른 '미쳐 돌아가는 세계'를, 다시 기다려본다.
‘제철 행복’ - 김신지
김복숭(작가):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는 도서계의 ‘힐링’ 장르. 하지만 이 책은 또 다르다. 김신지의 ‘제철 행복’은 총 24편으로 이루어진 에세이로, 저자가 자연과 오랫동안 쌓아온 관계와 그 시간이 삶에 남긴 작은 변화들을 차분히 되짚는다. 사계절을 큰 틀로 삼은 이 책에서 각 에세이는 1년을 이루는 24절기를 하나하나 주제로 삼아 펼쳐진다. 기후변화로 계절의 경계가 흐릿해진 요즘, 밖에 나가도 ‘아, 이제 봄이 끝나고 여름이구나.’ 하고 확신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이런 감각의 변화 속에서 저자는 네 개의 계절 대신, 약 2주마다 이름 붙여진 24개의 절기를 소개한다. 절기마다 담긴 이름 속 자연의 신호를 하나씩 짚어가며, 1년에 한 번 벚꽃을 기다리는 대신 보름마다 새롭게 달라지는 자연을 기대하는 즐거움을 일깨우는 셈이다. 동네를 산책하며 이곳저곳 ‘헤매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단순히 계절이 바뀌기만을 기다리는 것을 넘어 지금 곁에서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자연의 변화를 이 책을 통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식물에 익숙하지 않다면 이미지 검색의 도움을 받아도 좋겠다.) 여기에 저자가 삶에서 겪어온 인간관계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들이 더해지며 책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2월 입춘에서 시작되는 이 에세이들은, 각 절기 끝에 놓인 ‘마음챙김 과제’를 따라 이 책을 한 해의 리듬으로 함께 읽어보자고 조용히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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