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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인, 남선우(‘씨네21’ 기자), 김효진(대중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출처매드하우스

‘장송의 프리렌’ (넷플릭스 외)
윤해인: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은 서사의 결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다. 작중 용사 힘멜의 죽음이 시간의 흐름을 설명하는 기준점이 되는 이유다. 천 년을 사는 엘프 프리렌과 인간 용사 힘멜, 성직자 하이터, 드워프 전사 아이젠. 4명으로 구성된 모험가들은 10년간의 모험 끝에 마왕을 물리치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영웅이 된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보내다 50년이 지난 후 다시 조우한다. 다만, 천 년을 사는 엘프 프리렌과 인간의 시간은 대등하지 않다. 엘프에게 50년은 찰나이지만 인간에게는 생의 절반이 넘는 세월이다. 노인이 된 힘멜을 떠나보낸 프리렌은 처음으로 인간의 유한함에서 비롯된 상실과 후회라는 감정의 무게를 마주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프리렌은 힘멜의 영혼을 만나기 위해 산 자와 죽은 자가 대화할 수 있다는 ‘오레올’이 위치한 장소이자 과거에 마왕을 물리쳤던 ‘엔데’로 다시 향한다. 새로운 여정에는 새로운 동료도 생겼다. 프리렌은 하이터의 부탁으로 그가 거둬들인 전쟁 고아 페른을 제자로 삼아 가르치고, 아이젠의 제자 슈타르크를 파티의 전위로 받아들인다. 이제 막 모험가로서 걸음을 뗀 두 사람에게 프리렌은 자신의 능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의 애정 어린 가르침을 건네는 길잡이가 된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충분한 용기와 실력이 없다고 생각했던 슈타르크는 전위로서 자신만의 힘과 역할을 발현해낸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페른은 오랜 시간 쌓아온 깊은 내공을 기반으로, 세계관 내에서 설정 과다에 가까운 능력자인 프리렌의 복제체와 겨루어 이길 정도의 위력을 지닌 1급 마법사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지난한 생을 살아야 하는 엘프의 숙명이 만든 시니컬함과 지적 호기심만이 가득했던 프리렌 또한 두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사사로운 고민과 일상의 소중함을 보다 더 이해해간다. 이는 종종 ‘장송의 프리렌’이 그 장르적 특성에 따라 판타지나 모험물의 성격으로 분류되기보다, 성장과 힐링물이라고 여겨지는 이유일 테다. 

프리렌은 모험 과정에서 마을 곳곳에 놓인 힘멜의 동상을 청소해달라는 주민들의 사소한 부탁이나,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의뢰를 들어주곤 한다. 그에 대한 대가 또한 속세의 돈과 명예가 아니라, 빨간 사과를 청사과로 바꾸는 것 같은 시시한 마도서다. 뿐만 아니라 프리렌은 기질적으로 자신과 타인에 대해 무심한 듯하지만, 평범한 인간이 그들의 터전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며 자신의 능력으로 인간을 기꺼이 돕는다. 그 모든 이유는 하나다. “용사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이렇듯 ‘장송의 프리렌’은 프리렌이 과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힘멜이라는 인물을 빌려, 인간 서사에서 영웅이 지녀야 할 면모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자신의 힘을 다정하게 사용하는 용기. 그 다정함은 어떤 절대적 가치에 대한 추구보다는 나의 주변을 돌아보고, 결과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자 하는 작품의 메시지로 이어진다. 그래서 ‘장송의 프리렌’은 모험에서 발생하는 싸움과 전투가 아닌, 프리렌이 회상한 힘멜의 말처럼 그 모험을 여정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전면에 드러낸다.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았어도 그 과정이 즐거웠다면 된 거야.” 작품은 천 년을 사는 엘프라는 설정을 이용해, 인간의 기준으로 ‘두 번째 삶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시시하고 시덥지 않은 것이 필연인 인간사에서 무의미의 허무에 빠지지 않고, 어떤 태도로 인생을 마주할 것인가. 그 답은 31화에서 아이젠이 슈타르크에게 건넨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테다. “참으로 시시한 모험이었어. 하지만 참 신기하지. 동료들과 함께했던 그 시시한 모험들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으니.”

‘레이의 겨울방학’
남선우(‘씨네21’ 기자): 무수한 영화가 여름방학을 낭만화하는 동안 겨울방학은 퍽 소외되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것 같은 계절과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계절의 차이겠지만, 가라앉아야 떠오르는 이야기도 있다는 걸 ‘레이의 겨울방학’은 일러준다.

제목 속 레이(구로사키 키리카)는 도쿄에 산다. 어머니는 할머니 간병으로, 아버지는 직장 생활로, 오빠는 독립했기에 레이 곁을 비운다. 집 안을 아슬랑거리던 레이가 동네에서 농구공을 튀기다 만난 한국인 소녀 규리(정주은)도 비슷한 처지다. 타향살이 중인 아빠를 보러 홀로 먼 길을 날아왔건만, 바쁜 어른은 좀처럼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외로움이 외로움을 알아본 걸까. 레이와 규리는 우연을 인연으로 만든다. 서툰 영어로 대화를 지속한다. 서로의 가족에 대해, 미래에 대해, 가보고 싶었던 장소에 대해 떠들다가 덧붙인다. “굿 바이, 시 유 레이터, 콜! 콜!” 재회하리라고 굳게 믿는 이들의 인사는 경쾌하다. 그 흔한 통역 앱의 도움 없이 며칠을 동행한 두 사람에게 생긴 건, 정확해지려고 미루기보다 정다운 채로 현재에 머무는 소통의 자세. 박석영 감독은 자막까지 아껴가며 관객에게도 그 근육을 키워준다. 이런 방학이라면 몇 번이고 다시 겪고 싶다.

Jill Scott - ‘To Whom This May Concern’
김효진(대중음악 칼럼니스트): 11년 만에 발표된 질 스콧(Jill Scott)의 정규 6집 ‘To Whom This May Concern’은 단순한 복귀작이라 정의할 수 없다. 그의 예술적 지평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거대한 서사시에 가깝다.

이번 앨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주제 의식이다. 이전 작업물들과 궤를 달리하면서도 그 본질을 잃지 않는다. 전작 ‘Woman’이 성숙한 여성으로서 느낀 개인적인 사랑과 내면의 고백에 집중했다면, 이번 신보는 그 시선을 외부로 돌려 '우리'라는 공동체와 '인간성'이라는 담론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럼에도 그가 말하는 공동체의 중심에는 여전히 '여성들의 연대'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연대의 메시지는 수록 곡 ‘Pressha’와 ‘Beautiful People’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Pressha’가 현대 여성들이 마주하는 유무형의 사회적 압박을 날카로운 통찰로 짚어내며 저항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반면, ‘Beautiful People’은 그 치열한 삶을 살아내는 이들을 향해 따뜻하고 포용력 있는 위로를 건넨다. 질 스캇은 이처럼 차가운 현실 비판과 뜨거운 인간애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에게 가장 입체적인 응원을 보낸다.

음악적 문법 역시 한층 과감해졌다. 하우스, 힙합, 일렉트로닉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사운드의 외연을 넓혔다. 특히 하우스 비트를 차용한 ‘Right Here Right Now’는 그의 음악적 감각이 여전히 날카롭게 살아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에 J.I.D, 티에라 왁(Tierra Whack) 등 젊은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은 앨범에 현대적인 색채와 역동성을 더한다.

11년이라는 긴 공백은 질 스캇에게 더 단단하고 풍요로운 영감을 채우는 시간이었다. “창작 활동에 어려움을 겪은 게 아니라 창작을 위한 휴식을 가진 것이다.(I did not have a creative block, I just took a creative break.)”라는 그의 말처럼, 이번 앨범은 기다림의 시간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의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다시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리스너들을, 무엇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자 하는 수많은 여성들을 포근하고도 강렬하게 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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