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의 컬렉션을 세계 각지에 소개하는 ‘미술관 벽 너머(Hors-les-murs)’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 아홉 번째 버전이 한국에 최초로 공개되었다.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서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현대 건축의 거장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건축물에서 유럽 현대 미술사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거장 리히터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것으로도 유의미한 작품 감상의 기회가 될 것이다.
프랭크 게리의 작품다운 유니크함을 가진 건물의 존재감은 전시가 자리 잡은 4층 전시실에서도 느껴진다. 그 아이덴티티는 전시장 한 면을 비중 있게 차지하는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자연광이, 작품과 함께 공간을 채워내는 감성을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빛에서 색의 스펙트럼을 추출해놓은 듯한 ‘4900가지 색채’는 리히터가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배치한 것으로, 사람의 주관이 개입되지 않았기에 동등한 위계의 색채를 가진다고 말한다. 리히터는 작품 제작 과정에서 산업용 페인트 색상표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했으며, 그가 의뢰받았던 쾰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복구 작업에서도 이와 같은 프로세스를 사용하였다. 신성성의 재현인 스테인드글라스와 페인트 색상표라는 오묘한 연결 고리는, 전통과 시대의 흐름을 적절히 교차시켜 사용해온 리히터의 작업 세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중세 시대부터 빛을 내는 광원은 ‘룩스(lux)’, 그 광원에서 유래되어 공간을 밝혀주는 빛은 ‘루멘(lumen)’으로 칭했으며, 보석의 광채는 ‘스플렌도르(splendor)’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빛에 대한 관심과 다양한 개념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호칭들을 작품에 대입해본다면 스테인드글라스는 룩스를 사람들에게 감성적인 루멘으로 호환시켜주는 것이며, 색채 패널에서 인식되는 빛은 룩스를 보다 가시적인 스플렌도르로 물질화시켜 제시해주는 것이기에, 결국 그 빛의 본질은 하나로 통하게 된다. 이와 같은 리히터의 작업은 이질적일 수 있는 영역들을 교차 충돌시키고, 각각의 특징을 극대화하여 회화 영역에서 새로운 도전을 지속해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리히터는 독일 신표현주의가 강성했던 시기를 경험하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척해왔다.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미술을 시작한 그였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거부하고 서독으로 넘어와 본격적인 작업 활동을 시작할 정도로 예술에 대한 망설임이 없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미국 팝아트를 접하게 된 작가는, 그 당시 사진 예술의 부상으로 흔들리고 있던 회화의 의미와 본질에 도전하며 ‘리히터의 블러’라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내게 된다. 회화와 사진의 특징을 융합하여 만들어낸 그의 작품은 리얼한 이미지와 빛의 대비로 사진을 연상시키면서도, 대상의 윤곽선들을 모두 지워버리기에 회화적 효과로 귀결된다. 이미지를 나타내면서도 윤곽선 없이 동일한 위계를 갖게 된 화면이, 현재의 리히터가 이야기하는 상하 관계 없는 색채들로 이어져온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사진과 회화의 간극에서 끊임없이 예술에 대한 의문을 던졌던 리히터는 이제, 환원적 요소인 색에 집중하고 있다. 색은 우리가 눈으로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존재하며 세계를 구성하기에, 그는 최근 작업에서 위계질서 없는 평등한 색채를 보여주려 했다. 평등은 지금의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에, 작품과 연결시켜 바라본다면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동시에 리히터는 관람자들에게 각자의 시각 공식으로 ‘4900가지 색채’를 감상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시선 속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개성을 포용하면서 공존하는 이 사회의 지향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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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pace Louis Vuitton Seoul
TRIVIA
독일 신표현주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상황에서 민족성에 뿌리를 두고, 1970~80년대에 전개된 미술 운동이다. 전 세계 표현주의 경향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형식보다 내용에 주목하였다. 재현하는 역할로서의 형상에서 벗어나, 인간의 내면을 조명하는 표현 수단으로서의 형상을 추구하며 표현주의 전통에 기반을 갖고 있었다. 대표 작가로는 게오르그 바젤리츠, 안젤름 키퍼, 요르그 임멘도르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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