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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지은(작가)
디자인. 전유림

인문사회 연구자 안은별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10대를 보낸 일곱 명을 인터뷰한 책 ‘IMF 키즈의 생애’를 펴내며 말한 바 있다. “‘IMF’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으며, 회고의 대상이 아니라 무매개적으로 우리와 함께하게 된 시대의 공기다.” 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주인공 나희도(김태리)에게도 이 ‘시대’는 무매개적으로 닥쳐왔다. 1998년 여름, 일자리와 삶의 터전을 잃고 아우성치는 어른들과 달리 “뭔가를 잃기엔 너무 열여덟”인 그에게 중요한 건 꿈이자 동경인 펜싱 선수 고유림(보나)을 보는 일 그리고 만화 ‘풀하우스’ 신간 발매뿐이다. 그러나 IMF 여파로 학교 예산이 줄고 자신이 속한 펜싱부가 해체되며 희도는 시대에 꿈을 빼앗길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시대가 압수해간 것은 꿈만이 아니다. 유명 기업 대표의 아들 백이진(남주혁)은 아버지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하는 바람에 가족과 흩어지고 학업을 중단한 채 미래를 생계에 저당 잡힌다. 불과 몇 해 전 “좀 낭비합시다. 우리에겐 낭비할 청춘이 너무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라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소년은 이제 없다. 빚쟁이에게 멱살 잡혀 사죄하다 “대신 저도 절대 행복하지 않을게요.”라고 맹세하는 그는 고작 스물두 살이다.

 

꿈이 꺾인 자리에서 다시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희도와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자리에서 삶의 토대를 하나씩 쌓아 올리려는 이진 사이에는 독특한 우애가 싹튼다. 자신이 잃은 것만 생각하던 이진은 앞으로 얻을 것만 생각하는 희도를 보며 기운을 얻는다. 가장 가까운 가족인 엄마에게 지지받지 못하고 너무나 좋아하는 유림에게도 미움받아 외롭던 희도는 자신을 무조건 응원하는 이진을 통해 자신감을 얻는다. 현실의 무게와 죄책감에 짓눌려 행복을 포기하겠다는 이진에게 희도는 반문한다. “시대가 다 포기하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행복까지 포기해?” 그리고 덧붙인다. “나랑 놀 때만은 몰래 행복해지자.”고.

 

희도와 이진은 서로의 구원자다. 각자 약점을 가진 두 사람이 함께 발을 묶은 채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이인삼각 장면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전형적인 이성애 로맨스 구도에서 벗어난다는 면에서 한층 더 흥미로운 드라마다. 권도은 작가의 전작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가장 뜨겁고 복잡하며 끈끈한 감정은 여성들 사이에만 존재했던 것처럼,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10대의 희도가 누구보다 열중하고 상처받는 상대는 유림이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고 대책 없이 낙천적인 희도와 대조적으로 다정하고 차분한 이진의 캐릭터는 자기 연민에 매몰되지 않는 ‘무해한 남성성’에 대한 고민의 결과처럼 보인다. 그래서 유림이 희도의 팔목에 이진의 삐삐 번호를 적어주는 장면은 두 여자가 한 남자를 두고 경쟁하던 1990년대 후반의 이동통신 광고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세 사람의 관계가 그와 다름을 선언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희도와 이진, 유림 사이에는 서로 의식하고 선망하고 응원하고 매혹되고 인정하는 감정들이 변화하며 교차한다. 이처럼 인간과 인간이 서로의 다름을 마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거나 가까워지는 과정을 우리는 대개 성장이라고 부른다. “너는 너 말고도 다른 사람을 잘하게 해.”라는, 희도를 향한 이진의 말이 최고의 찬사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