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5일, 아주 근사한 힙합 뮤직비디오 한 편이 공개됐다. 배경은 미래, 황량한 마을과 사막을 횡단하는 영웅의 여정이 담긴 영상은 ‘스타워즈’, ‘듄’, ‘황야의 무법자’를 합친 듯한 사이파이(sci-fi) 서부극이다. 우아한 미장센까지 갖췄다. 그리고 중요한 음악. 처음 레터박스가 열리며 고혹적인 여성 코러스가 흘러나오고 주인공의 뒷모습으로부터 천천히 줌 인되며 회전하던 카메라가 옆모습을 비출 때 즈음 붐뱁(Boom Bap) 비트와 함께 랩이 내리꽂힌다. 이처럼 격정적인 순간을 배경으로 유유히 걸어가며 랩을 뱉는 인물은 바로 덴젤 커리(Denzel Curry), 곡의 제목은 ‘Walkin’이다.
그는 ‘Clout Cobain’(2018) 때처럼 다시 한 번 극적인 뮤직비디오와 음악을 선보였다. 붐뱁으로 시작하여 트랩(Trap)으로 끝나는 ‘Walkin’’은 커리가 곧 발표 예정인 새 앨범 ‘Melt My Eyez See Your Future’의 리드 싱글이다. 곡을 만든 프로듀서 칼 뱅스(Kal Banx)는 작곡가 키스 맨스필드(Keith Mansfield)의 ‘The Loving Touch’(1973)에서 두 마디의 코러스를 샘플링하여 과거의 힙합과 현재의 힙합이 공존하는 비트를 창조했다. 2022년은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벌써 올해의 힙합 트랙 중 하나를 만난 듯하다. 그만큼 끝내주는 곡이다.
덴젤 커리는 2010년대 후반은 물론, 오늘날의 힙합을 논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할 아티스트다. 플로리다 캐럴 시티에서 태어난 그가 처음 랩을 뱉은 건 겨우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중학생이 되어 첫 믹스테이프(Mixtape)를 작업했고, 고등학생 때 정규 데뷔작 ‘Nostalgic 64’(2013)를 발표했다. 이 앨범을 통해 지역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따지자면, 벌써 11년 차 베테랑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예들 사이에서 랩을 뱉고 앨범을 발표하는 커리의 모습에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랩과 결과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마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캐릭터부터 매력적이다. 랩 스타보다 록스타를 꿈꾸고 모시 핏※ 문화를 사랑한다는 그이지만, 누구보다 힙합에 진심이다. 전통적인 힙합, 트랩 뮤직, 드럼 앤 베이스, 재즈 등등 다양한 장르로부터 받은 영향을 자양분 삼아 틀에 갇히지 않은 힙합 음악을 선보여왔다. 래핑 역시 더할 나위 없다. ‘Walkin’’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어떤 스타일의 비트에서든 탁월한 랩으로 휘감아버린다. 옹골지고 타이트하며, 거침없다.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가사의 수준 또한 높다. 거칠고 하드코어한 단어가 펄떡거리는가 하면, 시적인 은유와 비유가 넘실거린다. 커리는 두말할 필요 없는 리리시스트(Lyricist)다.
‘사람들이 어떻게 대우받는지 봤어, 문제가 있지. 그들은 우릴 실패하게 하려 해, 체계적으로 말이야. 하지만 그걸 느꼈을 때, 내 눈은 녹아버렸지. 이기적인 자들은 끊임없이 이익을 얻고 있어. / I see the way the people get treated, it's problematic. They ready to set us up for failure, it's systematic. But when I felt it, my eyes melted. The selfish are constantly profitin' off the hеlpless.’ 같은 라인을 보라. 커리는 미국 역사에서 흑인들이 어떤 대우를 받아왔는지에 관해 강렬한 은유로 역설한다.
덴젤 커리는 오랫동안 우울증 분노조절장애를 앓아왔다. 이는 창작 활동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어린 시절에 듣고 영향받은 여러 장르를 힙합에 버무리는 시도를 할 여유도, 심적 상태에서 벗어나 또 다른 주제의 랩을 할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올해 발표할 다섯 번째 정규작 ‘Melt My Eyez See Your Future’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모든 것을 담아냈다고 한다. 커리의 정규 앨범은 언제나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런 그가 작심하고 만든 앨범이라니…. 어쩌면 클래식이 완성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시 핏(Mosh Pit): 콘서트 무대 바로 앞부분의 청중들이 춤추는 곳에서 일명 슬램 댄싱을 하며 즐기는 것. 록 공연장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TRIVIA
현재까지 알려진 새 앨범의 참여진은 리코 네스티(Rico Nasty), 제이펙마피아(JPEGMAFIA), 티페인(T-Pain), 슬로우타이(Slowthai), 케니 비츠(Kenny Beats), 썬더캣(Thundercat),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 등이다. 각기 다른 스타일과 스탠스의 아티스트가 포진한 이 리스트만 봐도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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