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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찬일(음식 칼럼니스트)
디자인. 전유림

‘오징어’ 놀이를 실제로 자주 했던 40대 이상의 한국인들은 서스펜스와 스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플레이스테이션도, 닌텐도도, 아니 컴퓨터가 없던 시절의 게임이었다. 아이들은 길에 쏟아져 나와서 오징어 게임을 했다. 음, 아마도 세계적으로 ‘베이비 붐’에 해당하는 나이 든 세대들의 이야기다. 좋다. 간단히 얘기하면, 저 세대에는 PC 방이 없었다. 길이 무대였다. 

 

‘오징어’에 왜 그렇게 몰두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누군가 “오징어 하자.”고 하면, 즉시 팀이 꾸려졌다. 상대의 압박을 뚫고 길목을 어떻게 건널지, 최종 목표에 어떻게 도달할지 게임 내내 초긴장 상태에 빠져 있었다(시험 공부할 때 그런 적은 없었지만). 오징어 게임은 육체의 힘과 전략이 총동원되는 특별한 게임이었다. 운동장에 그려진 오징어의 몸통 전체가 하나의 전쟁터였다. 성동격서 같은 페이크, 어떨 때는 전면적인 진입 작전, 패를 나누어 양동 작전도 펼쳐졌다. 스포츠는 종종 전투로 묘사되는데, 오징어는 쿼터백이 전략을 짜는 미식축구나 시간차공격 같은 속임수 전략이 벌어지는 배구 같은 놀이였다.

 

아이들은 그렇게 한바탕 힘을 빼고 나면 무언가를 먹고 싶어 했다. 배부른 음식도 좋고, 달콤한 유혹에 빠지기도 했다. ‘뽑기집’이라고 부르는 작은 천막에서 우리들은 요리 과학을 배웠다. 탄산나트륨의 작용과 설탕의 용해 온도, 설탕이 수분과 만나서 녹아 먹기 좋게 되는 캐러멜 기술. 그러자면 먼저 어머니에게서 돈을  타내는 기술이 있어야 했다.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달고나는 일종의 미식이다. 설탕이라는 현대의 산물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자로 변했다. 가게에서 파는 과자와 달리 달고나는 ‘셀프서비스’였다. 체험형 과자였다. 잘 만들수록 맛이 좋았다. 게다가 달고나라니. 이 낱말은 단것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키지 않는가. 달고나는 설탕을 녹이고 소다를 섞어 부풀리는 과자다. 불을 이용하여 설탕의 캐러멜라이징 기술, 거기에 소다가 부리는 마술을 목격할 수 있었다. 소다는, 가스를 발생시켜 설탕과자 내부에 공간을 만든다. 그것이 바삭해지는 비결이다. 알고 나면 간단하지만, 실은 물리 화학적으로 놀라운 현상이 아닌가. 프랑스의 제과 기술 중에는 ‘슈거 아트’가 현재도 아주 고급 문화로 남아 있는데, 실은 달고나 역시 이런 제과 기술의 일부다. 토피너트니, 캐러멜이니 하는 멋진 과자의 세계에 달고나도 한자리 차지하는 게 맞다. 아니, 그 비싼 누가(nougat) 역시 달고나의 형제 아닌가 말이다. 소다 대신 누가님께선 달걀흰자를 쓰셨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달고나와 뽑기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지만, 서로 비슷한 듯 다르다. 달고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여유 있는 미식(?)이었고, 뽑기는 드라마에서처럼 살 떨리는 승부의 세계였다. 달고나는 그저 먹기 위해 돈을 지불하면 끝이었지만, 뽑기는 모양을 잘 살려내야만 보너스를 받을 수 있었다. 승부사들은 뽑기를 했다. 뽑기집의 주인은 예쁘게 모양을 잘라낸 사람에게 과자 요금 면제나 한 번 더 뽑기를 할 수 있는 포상을 걸었다. 드라마를 만든 감독은 자신의 기억에서 뽑기의 아슬아슬한 긴장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뽑기를 하고 나면, 추운 겨울에도 긴장감으로 등짝이 축축했다.

 

뽑기집에는 블랙리스트도 있었다. 교묘한 술수(?)로 금지된 기술을 사용하는 아이들이었다. 뽑기를 가지고 가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구매 당사자가 아닌, 다른 친구의 도움을 받거나 도구를 사용할 기회를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최고의 도구는 바늘이었다. 당연히 절대 사용 금지였다. 침을 발라도 안 되었다. 하지만 뚝심 있는 어떤 친구는, 테두리부터 끈기 있게 침을 발라서 모양을 얻어내기도 했다. 이 정도는, 노력상이라도 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뽑기(극중에서 달고나)는 오직 손가락의 예민한 감각으로, 녹아버리거나 부러질 수 있는 설탕 과자의 한계를 뚫고 목표에 도달해야 했다. 나는 뽑기 이후로 그렇게 집중력 있게 인생을 살아본 기억이 없다. 그것이 분하지는 않다. 그때 뽑기로 받은 부상의 기쁨이 짜릿하게 내 몸에 새겨져 있는 걸로 충분하다. 그때 뽑기왕들은 유별난 손가락 기술이 필요한 정밀기계 장인이나 시계 수리 장인, 아니면 유전공학자가 되었을 것 같다. 뽑기는 사람을 단련시켰다. 사라질 줄 알았던 달고나와 뽑기가 부활했다. 서양의 토피너트와 누가처럼, 우리에겐 길거리 설탕 과자가 그 몫을 하게 될 같다. 물론 살 떨리는 게임 같은 건 없을 것이다. 그건 드라마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