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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장로(미술평론가)
디자인. 전유림

과학적 연구와 예술의 창조성을 통해 현시대 이슈에 주목하는 작가, 아니카 이의 한국 첫 개인전 ‘Begin Where You Are’가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7월 8일까지 진행된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인 아니카 이는 40세에 첫 개인전을 열며 비교적 늦은 나이에 데뷔했지만, 데뷔 5년 만에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갖는 구겐하임미술관의 휴고 보스상을 수상하고,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하는 등 독보적인 커리어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이처럼 화제가 되는 아니카 이의 이번 전시는, 그녀가 활동해온 작업 세계를 집약하여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갤러리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전시는 곧바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그와 동시에, 바닥을 뒤덮고 있는 녹색의 카펫과 창문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는 태양광은 외부와 전혀 다른 전시 환경을 선보인다. 초입에 설치되어 있는 이끼 배양 장치는 실험실에 있어야 할 듯한 비주얼로, 작가가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환경 파괴 이슈에 초점을 맞춘다. 관을 통해 주입되는 공기와 배양액을 통해 자라나고 있는 이끼는 전시가 진행되는 내내 생육되며, 지구온난화로 인해 과도하게 퍼지고 있는 이끼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살아 있는 해조류가 갤러리라는 인공적 장소에 들어와 있음으로 종간의 관계를 넘나드는 작품의 특징을 드러낸다. 
 

맞은편 벽에 설치되어 있는 ‘치킨스킨’ 시리즈에서도 혼합된 종들의 하이브리드성을 발견할 수 있다. 실리콘과 섬유를 통해 만들어진 프레임은 털과 모공으로 인해, 동물의 피부를 떠올리게 하지만 중앙에 자리 잡은 조화가 더해지며, 동식물 간의 영역을 허물고 구분이 와해된다. 이처럼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의 경계를 혼재시키는 것은 아니카 이 작품에서 주요하게 나타나며, 우리에게 인식과 감각을 넘나들도록 요구해온다. 말미잘과 아메바, 산호와 같은 이미지가 새겨진 ‘아네모네 패널’ 또한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유기체적 형태를 가지고 있음에도 매끄러운 표면은 컴퓨터 그래픽을 연상시키며, 물리적 현실 속에 나타난 가상의 이미지와 같은 인상을 심어준다.   
 

지하의 전시관에서는 아니카 이의 초기 작업 시리즈 중 하나인 ‘템푸라 프라이드 플라워’ 시리즈를 감상할 수 있다. 미각, 후각, 침, 땀 등 감각적인 측면을 형상화한 모습으로 만개한 꽃에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튀긴 뒤 레진으로 보존 처리를 한 작품이다. 아름다운 자연물로 여겨지는 꽃은 인간의 손을 통해 튀겨지면서 색이 바래고 흐려진다. 또한 레진으로 보존되어 자연물에서 인공물로 변해버리고 만다. 이러한 과정에서 폭력성과 불손함이 나타나며, 음식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작업 방식은 관람자의 미각과 후각의 자극이 유도된다. 이처럼 아니카 이의 작업에서는 과정과 맥락이 강조되기에,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 총체적인 부분들을 생각하고 인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한 것은 작품을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이 세계의 공존하는 모든 존재들을 떠올리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대상들이 양립하고 섞이며 그동안 인간이 정의해왔던 경계를 허물게 된다. 그것은 현재 인류세 시대 속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이 제시하는 바로, 존재 간의 상호작용과 그 열린 결말을 지향한다. 그렇기에 최근에는 포스트휴머니즘을 작업의 메시지로 사용하는 예술가들이 늘어났으며, 아니카 이도 그중 하나이다. 특히 그의 작품은 여러 매체들을 단순한 작업적 도구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 의미를 생산하는 매개체로 대우한다. 그리하여 작품에서 행위성을 가지는 대상은 미생물, 공기 등과 같이 다양하고 폭넓은 비인간적 존재로까지 확장되며, 다양한 가치, 존재를 존중하고, 함께 공존하려는 현시대의 중요한 논제를 제시해준다.  

  • Installation view, Anicka Yi: Begin Where You Are, Gladstone Gallery, Seoul, 2022. Photo: Chunho An 출처: 글래드스톤 갤러리(www.gladstonegallery.com)

TRIVIA

포스트휴머니즘

포스트휴머니즘은 근대적 이분법과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인간, 기계,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나 패러다임을 다룬다. 인간’ 개념에 내재된 위계의 해체와 이에 입각한 차별, 배제를 극복하는 데 주요한 담론이다. 이론적 원천으로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장애학, 동물 연구, 사이보그 이론과 같은 차별에 대한 여러 담론들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의미나 행위의 대상을 인간만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다른 주체들과 교류하며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 초점을 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