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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일권(리드머, 음악평론가)
디자인. 전유림

영국 힙합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파티 문화는 물론, 인종과 계급 문제가 충돌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발전해왔다는 점에서 미국 힙합과 비슷하지만, 음악적으로 차별화된 방향을 보였다. 런던 동부의 서민 주거지역에서 탄생한 장르 그라임(Grime)이 좋은 예다. 일렉트로닉을 계승한 프로덕션과 힙합을 계승한 보컬 형식이 결합된 그라임은 영국이 만들어낸 새로운 랩/힙합이었다. 

 

UK 개러지(UK Garage), 드럼 앤 베이스(Drum and Bass), 댄스홀(Dancehall), 덥스텝(Dubstep), 힙합이 어지럽게 뒤섞인 비트는 냉랭하고 과격했으며, 랩 역시 매우 공격적이고 뒤틀려 있었다. 젊은 세대는 이 같은 음악 특성에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자연스레 200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많은 신예 래퍼가 그라임의 영향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여러 서브 장르를 낳기도 했다. R&B 특유의 고혹적이고 달콤한 보컬이 결합된 리듬 앤 그라임(Rhythm & Grime), 보다 어둡고 폭력적인 가사의 랩을 얹은 다크사이드(Darkside), 두텁게 쌓인 신스와 깊이감 있고 낮게 깔린 베이스 융합이 특징인 서브로우(Sublow) 등이 대표적이다. 그라임 신드롬은 그야말로 영국 힙합의 저력을 제대로 보여준 순간이었다. 이젠 그라임만이 영국 힙합을 대변하는 시대가 아니지만, 영국 힙합의 현재를 설명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가 그라임이란 사실엔 변함없다. 장르를 추구하는 신구 래퍼들이 여전히 활약 중인 데다가 그라임 울타리 밖에서 장르의 흐름을 이끄는 래퍼와 그들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라임을 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흥미로운 모순 안에서 거론되는 몇몇 이름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이가 바로 아이치(Aitch)다.   

 

“나보다 어린 세대들은 그라임을 신경 쓰지 않아.(No One Younger Than Me Is Bothered About Grime.)”

 

그라임의 두 거물인 스톰지(Stormzy)와 와일리(Wiley) 사이의 디스전이 절정에 이르던 2020년, 아이치가 라디오 ‘캐피털 엑스트라(Capital XTRA)’에 출연하여 피력한 이 주장은 큰 화두가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라임이 런던을 대표하는 사운드라고 여기는 이들은 아이치의 주장을 비판했고, 영국 랩 음악의 보다 창의적인 다양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이 주장에 공감을 표했다. 

 

만약 아이치가 음악적으로 별 볼 일 없었다면, 이 발언은 단지 트롤링처럼 치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침없는 언행만큼 자유분방하고 탄탄한 음악을 구사하는 래퍼다. 그라임은 물론, 드릴, 트랩, 올드 스쿨 힙합 사운드 등 여러 스타일을 넘나든다. 기술적으로나 감각적으로나 완숙하다. 지금까지 첫 EP ‘On Your Marks’(2017)를 시작으로 총 석 장의 EP를 발표했으며, 히트 싱글도 여럿 배출했다. 그리고 올해 8월에 드디어 정규 데뷔 앨범 ‘Close to Home’을 발표할 예정이다. 최근 공개된 싱글 ‘1989’는 이 맨체스터 출신 재능 있는 래퍼의 새 앨범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같은 맨체스터 출신의 록 밴드 더 스톤 로지스(The Stone Roses)의 댄스 록(dance-rock) 명곡 ‘Fools Gold’를 샘플링하여 좀 더 역동적으로 가공한 프로덕션이 일품이다. 그 위에서 예의 유연한 플로우와 재치 있는 가사의 랩이 유영하며 흥취를 완성한다. 평소 미국 힙합 위주로만 들었던 이라면, 영국 발음 특유의 맛과 멋이 살아 있는 랩을 듣는 재미도 상당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스톰지와 와일리 외에도 오늘날 영국 힙합의 강력한 힘을 체감케 하는 래퍼는 여럿이다. 당장 2021년만 돌아보더라도 데이브(Dave)의 ‘Were All Alone in This Together’, IDK의 ‘USee4Yourself’ 같은 작품이 영국을 넘어 세계 힙합 팬을 흥분케 했다. 아이치는 충분히 릴레이의 주자가 되고도 남을 만한 래퍼다. 물론 그가 배턴 이어받기란 숙명 따위를 신경 쓸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TRIVIA 


‘Close to Home’의 첫 싱글 ‘Baby’

지난 3월 10일 발표한 ‘Close to Home’의 첫 싱글 ‘Baby’에는 미국의 R&B 싱어송라이터 아샨티(Ashanti)가 참여했다. 하지만 그가 직접 노래하진 않았다. ‘Baby’는 아샨티의 2003년 트랙 ‘Rock wit U (Awww Baby)’에서 보컬 부분을 샘플링했는데, 그 비중이 매우 커서 아예 참여 아티스트로 크레딧에 올린 것이다.